[광화문 칼럼]가짜 민주주의 부르는 ‘팬덤 정치’

정상혁 기자 ㅣ digihyuk@chosun.com
등록 2020.08.27 12:28

디지틀조선일보 방송본부장 정상혁.


야구팬들은 추종하는 구단의 승패에 일희일비한다. 그들의 구단 충성심은 이순신 장군 버금가고 정보력은 미국 CIA 뺨친다. 지인 몇명은 생업의 성과보다 구단의 성적에 더 민감하다. 아이돌 쫓는 사생팬들도 마찬가지다. 아미(ARMY)에게 BTS 멤버 개개인의 존재는 각별하다. 멤버가 생일을 맞으면 돈을 갹출해 광고비만 몇 천 만원 하는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축하 메시지를 띄운다. 스타의 한정판 굿즈(goods)가 온라인에 2~3배 가격으로 올라와도 광클(미치도록 빠른 클릭)로 기꺼이 구매한다.

팬덤은 디지털 미디어 발전과 함께 자라왔다. 스타와 팬 사이의 소통 방식이 입체화되며 나타난 문화 현상으로 K팝 세계화의 동력이기도 하다. 특정 인물에 몰입하는 팬덤의 본질은 덕후 문화와 맞물려 배타성을 동반한다. 또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충동적이다. 이런 본질들이 스포츠나 대중문화에서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LG팬과 두산팬이 혹은 아미(ARMY)와 엑소엘(EXO-L)이 편 갈라 싸운다고 해서 나라가 두쪽 날리 없다. 근데 이 팬덤 현상이 정치권으로 확산되면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최근에 발간한 책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민주주의는 어떻게 끝장나는가’에서 팬덤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팬덤이 무서워서 당내에서 아예 이견을 낼 수가 없다. 위를 봐도, 옆을 봐도, 밑을 봐도 모두 한통속이니 사실상 민주집중제가 돼 버렸다”. 공동 저자 서민 단국대 교수도 같은 책에서 “팬덤이 대통령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순간, 그 팬덤은 나치 때 게슈타포가 그랬던 것처럼 정권에 대한 건설적 비판마저 봉쇄하는 친위대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지금 소위 문팬이라 불리는 문 대통령의 팬덤이 보이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며 팬덤 정치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팬덤 정치의 부작용을 보여 준 대표적 사례는 중국 문화대혁명의 ‘홍위병(紅衛兵)’들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팬덤이었던 그들은 우파 기득권 세력을 적폐로 몰아 축출했고, 퇴물 취급한 문화유산을 제거하며 혁명가 행세를 했다. 상식에 벗어난 정책들도 마구 쏟아 냈다. 빨간색의 교통 정지신호가 혁명과업 전진을 상징하는 색과 같아 안 된다며 파란색으로 바꿨다가 교통사고가 급증해 빈축을 샀다. 자동차 우측통행이 미국 제국주의 유산이라며 바꾸려다 영국이 좌측통행인 걸 알고 없던 일로 하기도 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한국판 홍위병들이 만든 설익은 정책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뜬금없는 탈원전 정책으로 관련 업계를 초토화시켰고, 스물세 번 내놓은 부동산 정책 끝에 서울 아파트 값을 52%나 올려놨다. 가장 큰 치적으로 삼던 대북 평화정책엔 정작 평화가 사라지고 북한 핵미사일만 남았다. 한국판 홍위병들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이 추종하는 대통령 밖에 없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 2년여 만인 1968년 전국이 혼란에 빠지자 홍위병 간부들을 불러 호되게 나무랐다. 그리고 공권력을 동원해 그들을 진압했다. 일종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이었다.

여권은 지금 팬덤 정치에 푹 빠져있다. 팬덤은 추종 대상을 맹신한다. 진실을 외면하고 감성적 이미지로 포장된 지도자에 대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비평 분야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 서평가 미치코 가쿠타니는 저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서 “사실에 대해 무관심하고 이성보다 감성에 기대는 시민들이 잘못된 지도자를 뽑아 프로파간다 만연한 가짜 민주주의가 판치는 세상이 됐다”고 주장했다. 한국 집권여당에 뿌리 내린 팬덤 정치는 주권자인 국민을 대통령의 추종자로 전락시켰다. 이미 자성 기능을 잃은 그 동네에서 비판적 사고는 설 땅을 잃었고, 사방엔 문비어천가만 들려온다.

이성과 논리 그리고 협치가 중요한 정치판에 비이성적이고 배타적인 팬덤 감성이 스며들어 의회제도를 망치고 가짜 민주주의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팬덤 정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마땅히 해체돼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팬덤 정치 한가운데 서있는 대통령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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