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칼럼] 국익은 항상 동맹에 앞선다

정상혁 기자 ㅣ digihyuk@chosun.com
등록 2022.08.02 17:21

디지틀조선일보 정상혁 방송본부장

미국과 일본이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해 뭉쳤다. 지난 29일 양국 외교 경제장관은 경제정책협의위원회(EPCC)를 열고, 양자컴퓨터나 인공지능에 필요한 반도체 개발을 위해 공동 연구센터를 설립키로 합의했다. 1986년 반도체협정을 통해 미국이 일본 반도체 산업을 초토화시킨 지 36년 만이다. 설욕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일본이 미국과 다시 손을 잡은 것이다. 국익은 항상 동맹에 앞선다. 과거 반세기 반도체 전쟁이 그래왔다.


전후(戰後) 중국 소련 등의 공산세력 저지를 위해 일본 재건이 필요했던 미국은 전자 통신기술 이전을 통해 일본의 자립을 도왔다. 반도체도 그 중 하나였다. 1950년대 세계 최고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웨스턴 일렉트릭, RCA, ITT 등이 일본 업체들과 로열티 기반 기술제휴를 맺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일본 NEC, 도시바, 히타치 등이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며 세계 시장의 75%를 차지하자 미국은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1985년 반강제적 엔화 절상을 유도한 플라자 합의와 더불어 미국의 매몰찬 보복 관세에 일본은 결국 무릎을 꿇고 이듬해 미일 반도체협정에 서명했다. 일본 내 외국산 점유율 확대와 일본 반도체 수출가격 통제를 골자로 한 이 협정으로 일본 반도체 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한국은 반사이익을 누렸다.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을 1854년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에 빗대 ‘제2의 굴욕 개항’이라 부른다면 지난 29일 미일 반도체 공동개발 합의는 1951년 미일 안전보장조약에 빗대 ‘제2의 안보조약’이라 부를 수 있다. 반도체는 이미 각 나라의 군사력에 버금가는 핵심 안보자산이 됐기 때문이다.


이번 미일 합의의 골자는 2025년을 목표로 한 2㎚(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반도체 양산이다. 닛케이신문에 따르면 공동연구센터는 올해 일본에 설립되며 일본 도쿄대, 산업기술종합연구소, 이화학연구소와 미국 국립 반도체기술센터(NSTC)가 참여할 예정이다. 반도체는 전기 회로가 가늘수록 고성능이고 전기소모가 적다. 삼성은 지난달 25일 세계 최초로 3nm 제품 양산에 성공했고 대만 TSMC는 올해 하반기 출시를 앞두고 있다. 현재 10nm 미만 반도체 생산 점유율은 대만이 63%, 한국이 37%다.(2021년 10월 IC인사이츠 조사) 이번 미일 공동연구의 최종 목표는 반도체 선진국인 한국과 대만 따라잡기다. 중국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대만 TSMC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 또한 불안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일 양국의 도전이 성공하려면 세계 최고 생산 능력을 갖춘 한국과 대만의 협력이 필수다. 이를 의식했는지 일본 하기우다 경제산업상은 기자회견에서 새 연구조직에 대해 “미국과 일본뿐 아니라 같은 생각을 하는 나라들에도 열려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일본 경제판 2+2 회의.(왼쪽부터) 일본 하기우다 고이치 경제산업상,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 미국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로이터,뉴스1


'칩4 동맹'과 ‘미국 반도체산업지원법’에 이은 ‘미일 반도체 공동개발’을 통해 미국은 우리에게 자기 편에 설 것을 압박하고 있다. 이에 중국에서 낸드플래시 40%와 D램 50%를 각각 생산하고 있는 삼성, SK하이닉스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중국은 연일 엄포를 놓고 있다. 지난달 26일 관영 매체 환구시보는 한국의 ‘칩4 동맹’ 참여에 대해 ‘상업적 자살’이라 경고했고,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국은 장기 이익과 공평하고 개방적인 시장 원칙에서 출발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으로 일하길 바란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최근 한국 반도체 산업이 처한 상황을 보면 열강들 틈에 끼어 오도 가도 못 하는 구한말 형국이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우리에겐 반도체 기술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는 것이다. 업계의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 설계 능력과 일본 장비에서 소외되면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미국 편에 서는 게 유리하다”고 말한다. 사실상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중국 시장에 미련을 두는 건 어리석은 짓일 수 있다. 자국산 우선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중국 시장에서 한국 반도체가 장기간 살아 남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중국 진출 초기 승승장구하다 최근 중국산에 밀려 고군분투 중인 자동차, 모바일, LCD를 보면 반도체의 미래 또한 점쳐진다. 안철수 의원은 “중국 수출 감소로 인한 단기적 손해에도 불구하고 차세대 반도체 공급망에 참여하기 위해 칩4 가입은 불가피하다"고 말했고, 양향자 의원도 “반도체 특허는 미국이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고 한국은 그 기술들을 임차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칩4 동맹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또한 아직까지 좌고우면하고 있지만 마지막에 가선 미국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칩4가 중국에 대항해 어떤 형태의 공급망 체계를 구축하려는 지 아직 구체화된 것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그 동맹에 참여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부분들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국익은 항상 동맹에 앞선다. 칩4는 동맹이기에 앞서 이익 공동체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우리를 초대했고 다행히 우리는 딜(deal)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체급을 갖추고 있다. 구한말 한국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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