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칼럼] ‘삼전도 굴욕’과 日 강제징용 피해배상법

정상혁 기자 ㅣ digihyuk@chosun.com
등록 2023.03.07 15:36 / 수정 2023.03.07 17:44

디지틀조선일보 정상혁 방송본부장.

‘삼전도의 굴욕’은 조선 왕 인조가 청나라 군주 숭덕제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부끄러운 역사다. 위기에 대비하지 않은 조선왕조 운운하는 것은 패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당시 두 명의 충신은 인조에게 상반된 의견을 고했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에 굴종하는 것은 명분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멸망할지언정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조판서 최명길은 “백성이 고통 받고 종묘사직이 멸망할 수 있는 중차대한 상황이므로 청나라에 대한 굴욕적 항복도 감내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그는 “주화(主和)라는 두 글자가 평생 허물로 따라다니겠지만 지금은 화친(和親)이 맞다”며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답도 내놓았다.

두 충신에 대한 얘기는 영화 ‘남한산성’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소설가 김훈이 나눈 대화로도 유명하다. 김 작가는 ‘남한산성’을 탈고한 지 몇 년 후 초겨울 서울행 KTX열차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났다. 김 전 대통령은 김 작가에게 김상헌과 최명길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더니 혼잣말로 또렷이 대답했다고 한다. "난 최명길을 긍정하오." 이념과 현실 사이 벽에서 몸을 갈며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그가 최명길의 실리주의에 손을 들어 준 것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6일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일본 강제징용 피해배상안에 대해 "가히 삼전도 굴욕에 버금가는 외교사 최대의 치욕이자 오점이 아닐 수 없다"고 힐난했다. 이 대표는 과연 최명길의 고뇌와 그 고뇌에 공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역사 인식에 대해 고민해 봤을까?

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피해배상법엔 사실상 아쉬운 점이 많다. 국민들이 바라는 만점짜리 해법은 아마도 일본 정부의 통렬한 반성과 사죄 그리고 변제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역사의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미국은 최근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엄지를 치켜들고 “여기 모여라”를 외치고 있다. 국가안보와 직결된 4대 핵심 품목(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핵심광물, 의약품) 공급망을 중국, 러시아 등 전체주의 국가들을 배제한 동맹체제로 구축하려는 계획이다. 문제는 자유진영 동맹들 간의 경쟁이다. 발빠른 대만은 이미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 TSMC를 내세워 일본과 손을 잡고 구마모토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미국 또한 2025년 2나노미터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일본과 함께 차세대 반도체 제조기술개발센터(가칭)를 세운다. 이 프로젝트엔 미국 국립반도체기술센터(NSTC)와 일본 도쿄대, 산업기술종합연구소, 이화학연구소가 참여할 예정이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시장 점유율은 55%로 세계 1위, 장비는 35%로 미국(40%)에 이은 2위다. 반도체 초강국 한국이 이런 나라를 이웃에 두고도 활용 못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전문가들은 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피해배상 대책으로 지난 문재인 정권 때 일본이 취했던 반도체 소부장(부품·소재·장비) 수출 규제가 풀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조치로 좌파진영으로부터 매국노와 다를 바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아마 훗날에도 그에겐 친일 대통령 딱지가 계속 붙어다닐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지지층 결집을 위해 죽창가를 외치며 반일 외교를 고집한 문재인 대통령과 국익을 위해 지지율 하락을 무릅쓰고 친일 외교를 감행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후세의 역사적 평가는 똑바로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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