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경영에 빠지다

    입력 : 2015.03.17 09:07


    모 식품기업 차장 김모씨(41·서울 세곡동)는 토요일 아침 7시에 눈을 뜬다. 쉬는 날이지만 늦잠을 잘 수는 없다. 여섯살짜리 딸 때문이다.


    딸은 '아빠가 매일 회사에서 늦게 오니 토요일은 종일 놀아달라'며 아침부터 김 차장을 깨운다. 김 차장은 일주일 내내 매일 야근과 회식을 한다. 일요일은 거래처 임직원과 골프를 치거나 회사 안팎 경조사를 챙긴다. 김 차장의 딸이 아빠와 놀 수 있는 시간은 토요일 뿐이다.


    바쁜 직장인은 가정에 충실하기 쉽지 않다. 직장 스트레스로 가족을 챙길 여유가 없어지면 갈등이 생기고, 이는 다시 불안정한 직장 생활로 연결된다. 직장인 전문 상담기업 다인C&M에 따르면 지난해 약 2만5000건의 전체 상담 중 60%가 직장과 가족 관련 내용이다.


    이린아 다인C&M 팀장은 "직장인 다수가 출근 후에도 가족 관계, 자녀 걱정을 늘 하고 있어 당장의 업무에 집중하기 어렵다"며 "가정이 편하면 무의식 중에 일을 방해하는 요소가 없어져 실제 업무 능력도 오른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롯데·신세계·CJ·SPC 등 대형 유통 기업들이 앞다퉈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경영에 나섰다. 가정이 화목해야 직원의 업무 집중도와 창의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의 단순한 직원 복지 확대에서 더 나아가 그 가족까지 배려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방식은 난임(難妊) 수술 지원, 조기퇴근, 강제 소등(消燈), 직원 어린이집 운영 등 다양하다.


    서울시 중구 쌍림동의 CJ제일제당(097950) (343,500원▲ 11,000 3.31%)센터에선 보름에 한번 오후 5시 30분이면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진다. 퇴근을 종용하는 신호다. 회사 측은 이날을 '무슨 일이 있어도 빨리 귀가해 가족과 시간을 보내라'는 뜻에서 패밀리데이로 이름 붙였다.


    CJ제일제당의 한 직원은 "법적으로 시간이 보장돼 있지만 상사 눈치와 밀린 업무로 제 때 퇴근은 힘들다"며 "패밀리데이에 음악이 흐르면 상사들이 나서서 평소보다 일찍 갈 수 있게 해주고, 아이들과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CJ그룹은 임신 초기부터 자녀가 만8세가 될 때까지 직원이 출퇴근 시간을 정할 수 있는 임산부 유연근무제를 실시 중이다. 난임으로 고통받는 직원 부부에게 수술비를 전액 지원하기도 한다. 서울 쌍림동과 상암동 사옥에는 '키즈빌'(어린이집)을 밤 10시까지 운영해 직원 자녀들을 돌본다.


    이마트(139480) (218,500원▲ 3,000 1.39%)는 서울 성동구 이마트 본사 1층에 어린이집을 운영한다. 교사 8명이 직원 자녀 27명을 아침부터 저녁 8시까지 책임진다. 학부모 만족도는 높다. 위탁 운영을 맡은 보육재단이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식재료는 유기농 인증 제품만 쓴다. 정부는 국공립 어린이집에 아이 1명의 한끼 식비로 1700원을 지원한다. 이 어린이집의 한끼 식비는 약 5500원이다. 정부 지원을 초과한 나머지 돈은 전부 회사가 부담한다.


    조선일보DB


    롯데마트는 5년 전부터 매월 세 번째 금요일을 '패밀리데이'로 운영한다. 회사 측은 이를 확대해 지난해 1월부터 매주 수요일을 '가족 사랑의 날'로 만들었다. 이날 야근을 하기 위해선 과장·차장·팀장을 거쳐 본부장으로부터 야근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허가 없이 야근을 할 경우 사무실 불을 꺼버린다.


    또 매달 고교생 이하 자녀가 있는 여직원 100명에게 피자·치킨·음료 40인분을 제공한다. 직원 270명이 16.5㎡(5평)씩 땅을 배정 받아 가족들과 텃밭을 기르는 가족 농장도 운영한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직원뿐 아니라 그들 가족의 기까지 살리기 위해 마련한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동원그룹도 롯데마트처럼 매주 수요일을 '가정의 날(3무(無) 데이)'로 정했다. 이날은 비상 상황이 아니면 직원들이 회의·회식·야근을 할 수 없다. 미취학 아동을 둔 여성 직원은, 자녀가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출퇴근 시간을 탄력적으로 정할 수 있다.


    현대백화점그룹 제공


    롯데백화점은 3월부터 육아 휴직 기간을 기존 1년에서 최장 2년으로 늘렸다. 이 회사는 여직원이 별도 신청서를 내지 않아도, 아이를 낳으면 출산 휴가 후 바로 1년 간 휴가를 주는 '자동 육아 휴직 제도'를 운영 중이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자녀를 위한 정책도 있다. '자녀돌봄 휴직'은 직원이 입학한 자녀의 학교 적응을 최장 1년까지 도울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올해부터는 출산을 앞둔 직원이 병원 검진을 갈 때 택시비를 추가 지원한다. 지금까지는 직원의 출퇴근에만 택시비를 줬다.


    현대백화점(069960) (136,500원▼ 2,000 -1.44%)은 초등학교, 중학교에 입학하는 자녀를 둔 직원에게 '스쿨박스'를 선물로 준다. 스쿨박스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버스 캐릭터로 포장했다. 안에는 미술 앞치마, 악기 세트 등 학용품 23종과 입학 축하 편지가 들어 있다. 매년 100여명의 직원이 이 박스를 받는다.


    현대백화점은, 직원이 회사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만족도가 높아지면 아이디어가 나오고 조직 경쟁력이 향상된다고 판단해 행사를 기획했다.


    나길용 현대백화점 경영지원본부 팀장은 "일과 가정이 양립(兩立)하도록 다양한 정책을 마련해 직원뿐 아니라 그 가족의 만족도까지 높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