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휘발유 의무구매하라고?"...석유공사에 뿔난 알뜰주유소

    입력 : 2015.04.22 09:39

    알뜰주유소의 석유제품 판매 가격은 자가 상표 주유소와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


    "가뜩이나 석유공사로부터 공급받는 가격이 비싸 골머리인데 75% 이상을 의무적으로 사야 한다니 허탈할 뿐입니다. 정부 말만 믿고 알뜰주유소로 바꾼 걸 후회하고 있습니다."


    서울 서부권에서 알뜰주유소를 경영하는 김주환(56·가명)씨는 요즘 업황을 묻는 질문에 분통부터 터뜨렸다. 대형 정유사의 갑(甲)질 횡포가 싫어 알뜰주유소로 바꿨는데, 한국석유공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뜰주유소 업계에 따르면 석유공사는 국제유가가 급락하기 시작한 지난해 하반기 이후 일반 정유사나 대리점에서 살 수 있는 현물가격보다 비싼 가격에 석유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이에 알뜰주유소 업주들이 다른 정유사나 대리점에서 석유제품을 들이자 아예 의무구매 규정을 강화키로 했다.


    석유공사는 하반기부터 알뜰주유소가 석유공사로부터 75% 정도의 석유제품을 의무적으로 구매하도록 관련 규정을 크게 강화하겠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 석유공사, 자사 석유제품 구매 의무비율 50%→75%로 상향


    지난 3월 대전 리베라호텔에서열린 한국자영알뜰주유소협회 정기총회에서 석유공사는 의무구매 규정 강화를 골자로 한 알뜰주유소 평가제도 개편안을 발표했다. 현재 석유공사는 ▲법규준수 ▲계약이행 ▲브랜드관리의 3가지 항목에서 알뜰주유소를 평가해 기름탱크 도색 및 청소비용 지원 등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석유공사는 현재 50%인 의무구매 비율을 75%로 끌어올리고, 미달 수준에 따라 점수를 깎겠다는 방침을 전했다. 한국거래소 전자상거래를 통해 석유제품을 구매한 물량을 의무구매로 인정했던 규정도 없애기로 했다. 대신 의무구매 비율 준수에 할당된 점수를 현행 15점에서 50점으로 대폭 늘린다.


    알뜰주유소 업주들은 의무구매를 강제하고 나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알뜰주유소협회 관계자는 "상당수 주유소가 50% 이상의 석유제품을 정유사나 대리점으로부터 직접 구입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많은 경우 그 비율이 80%인 곳도 있다"고 설명했다.


    ◆ 알뜰주유소 "석유공사 공급가, 리터당 100원 더 비싸"


    어쩌다가 알뜰주유소들이 석유공사로부터의 석유제품 구매를 꺼리게 됐을까.


    경기도에서 알뜰주유소를 운영한다는 한 자영업자는 "유가가 떨어진 지난해 9월 이후 석유공사 공급가가 다른 정유사·대리점의 공급가(현물가격)보다 높다"며 "리터당 100원까지 비싸니 석유공사 제품 구입량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가격 차이는 L(리터)당 20원까지 좁혀진 상태다.


    이는 원유제품의 가격 책정 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알뜰주유소가 석유공사로부터 공급받는 석유제품 가격은 싱가포르 국제시장 가격을 기준으로 한 달에 한 번 바뀐다. 반면, 정유사가 공급하는 현물가격은 국내 석유제품 공급 상황에 따라 1주일에 2번꼴로 달라진다.


    김형건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는 "석유제품 가격이 급락하는 상황에서 석유공사 가격이 실제 거래 가격 변동을 좇아가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했다"며 "정유사와 대리점 간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석유공사의 공급가격이 국내 석유제품 수급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도로공사는 지난해 10월부터 고속도로에 설치된 170개 주유소에서 알뜰주유소 간판을 떼고 ‘ex-oil’이라는 자체 브랜드 간판을 내걸기 시작했다. /한국도로공사 제공


    ◆ "의무구매 강제는 석유공사 고육책"


    이에 한국도로공사, 농협 등 기존에 자체 공급 조직이 있다가 알뜰주유소에 편입된 곳은 이탈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도로공사는 지난해 10월부터 자사가 관리하는 170여개 주유소에서 알뜰주유소 간판을 떼고 대신 자체 브랜드인 'ex-oil'를 내걸기 시작했다.


    도로공사 주유소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게 도로공사의 설명이지만, 주유소 업계는 "예전처럼 자체적으로 석유제품을 수급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라고 해석한다. 도로공사는 지난해 하반기 별도로 석유제품을 공동구매하기 시작했다. "L 당 20원가량 공급가를 낮추는 데 성공했다"는 게 도로공사의 설명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석유공사의 의무구매 강제 움직임은 알뜰주유소들의 이탈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게 주유소 업계의 분석이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알뜰주유소들이 석유공사로부터 휘발유·경유 구매량을 줄이면 그만큼 석유공사의 협상력이 줄어 정유사로부터 석유제품을 공급받는 가격이 올라간다"며 "알뜰주유소의 반발을 감수하고서라도 의무구매 규정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형건 교수는 "정부가 민간 시장에서 행위자로 참여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며 "대개 이런 경우 정부는 민간에 완전히 맡기거나 통제를 강화하는 양자택일적 상황에 몰리곤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