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보다 사람에 밝아야 투자고수 됩니다"

    입력 : 2015.06.01 10:14

    브니 예 밸류 파트너스의 공동창업자 겸 치타인베스트먼트 회장


    미국에서 마르크시즘의 역사를 공부하던 청년이 아시아의 금융 허브(hub) 홍콩의 거물 투자자가 됐다. 자산규모 18조원의 홍콩 최대 자산운용사 밸류 파트너스의 공동창업자이자 명예회장인 브니 예(V-Nee Yeh, 56) 이야기다.


    예 회장은 아시아가 펀드 불모지나 다름없던 1993년 밸류파트너스를 창업해 아시아를 대표하는 자산운용사로 키웠다. 4월 말 기준 밸류파트너스 자산 규모는 170억달러(약 18조6000억원)로 홍콩 자산운용사 중 가장 크다. 2003년에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북미에도 투자하는 헤지펀드 치타인베스트먼트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홍콩의 금융중심가인 센트럴역 인근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얼마전 만난 예 회장의 첫 인상은 개성이 넘쳤다. 살 짝 삐친 짧은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다이어트코크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모습이 '투자전문가'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세련된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의 아내인 미라 예(Mira Yeh)가 홍콩 상류사회의 패셔니스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 것이 잘 와 닿지 않았다.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그의 뒤쪽 서재에는 중국어로 번역된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 전집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홍콩 재계에서도 소문난 와인 애호가다).


    예 회장의 조부는 홍콩의 유력 건설사 신총(Hsin Chong)의 창업자다. 남 부럽지 않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였지만 대학에 입학해 마르크시즘의 역사를 공부했다. 이유는 엉뚱했다.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도표가 너무 싫었어요. 수학도 바닥은 아니었지만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경제학과 비슷하면서 도표를 다루지 않는 과목을 찾다가 대안으로 선택했습니다."


    교육열이 높은 엘리트(그의 부친은 윌리엄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하버드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부모를 둔 탓에 학점관리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해낸 묘안은 예술과 문화인류학, 철학과 종교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의 '입문' 과목을 수강하는 것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투자자로 성공하는데 필요한 자양분이 된 광범위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투자에 성공하기 위해 숫자에 밝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투자에서) 숫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다른 것들을 연결시키는 능력입니다. 금융 관련 지식은 배우면 되지만 폭넓은 지식과 경험은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어요."


    학부 졸업 후 아이비리그의 명문 컬럼비아대학 로스쿨에 진학했지만 인턴 경험을 통해 맛본 로펌 생활의 단조로움에 실증을 느껴 진로를 두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증시 규제에 관한 과목을 수강한 것을 계기로 투자에 눈을 뜨게 됐다.


    소문난 와인 애호가인 예 회장의 개인용 와인셀러/브니 예 제공


    모든 것이 우연의 연속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성공의 밑바탕에는 확고부동한 원칙이 있었다. 좋아하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과 스스로에게 냉정해야 한다는 신념이 그것이다.


    두 번째 원칙과 관련해 예 회장은 "자아가 강하지 않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라고 말했다. "자신감이 없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감은 늘 충만합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을 경쟁구도로 보기 때문에 행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그의 투자 성공의 비결이기도 하다. "투자자로서의 자신의 장단점 파악을 마쳤다면 거기에 맞는 전략을 택해 일관성 있게 접근해야 합니다. 일관성이 없어도 단기적으로는 수익을 거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 더해 파트너를 고르는 남다른 안목도 그가 말하는 꾸준한 성공의 비결 중 하나다. 예 회장은 사업 파트너를 고를 때 오랫동안 시간을 두고 관찰한다. 능력과 성격 외에 ‘공정성(fairness)에 대한 가치관’이 같아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식당에서 종업원이 주문 실수를 했을 때 야단칠 수 있는 권리가 손님에겐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공정한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가치관이 같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선정된 파트너 중에는 10~20년 넘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밸류파트너스의 공동창업자인 체쳉혜(謝清海) 현 회장과 치타인베스트번트의 대표이사인 레이몬드 왕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 파트너로는 2013년 치타인베스트먼트의 사내 스핀오프(Spin-Off) 회사인 페더스트리트(Pedder Street)를 공동 인수하며 긴밀한 협력자가 된 최권욱 안다자산운용 회장이 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9시에 잠자리에 든다는 그가 평상시 식사도 아침 한 끼만 먹으면서도 다양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원동력도 오랜 세월 신뢰를 바탕으로 다져온 파트너십이다.


    최근 중국 경제성장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작년에 외국 투자자금이 급속하게 빠져나갔다는 점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이 조심스럽게 '중국 경제 위기설'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이달 들어 중국 증시와 홍콩증시에 동시에 상장된 주식 일부가 갑작스러운 폭락세를 보이면서 중국 경제에 이상 신호가 나타난 게 아니냐는 불안감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예 회장은 “중국 경제에 대한 우려가 많지만 결국은 연착륙할 것으로 본다”면서 낙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중국은 자본시장이 폐쇄적이어서 일부 투자금이 빠져나간다고 해도 유동성 위기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의 부채가 늘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중국의 저축은 GDP의 50%에 달합니다. 오히려 과잉 저축 상태죠. 부실기업 문제가 불거질 경우 개별 은행이 자금 부족을 겪을 수는 있겠지만 위기로 이어지진 않을 것으로 봅니다."


    그는 인도와 일본의 올해 경기 흐름을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특히 인도는 저유가로 내수 경제가 살아나면서 올해 경제성장률에서 중국을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유가가 떨어지면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곳이 인도입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인도에 최고의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은행이 마침내 시장에 돈을 풀었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조정기는 겪겠지만 경기가 후퇴하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한국 경제의 전망을 묻는 질문에는 "여전히 저평가된 시장"이라면서 "저유가에 물가도 높지 않다는 점을 들어 경기 흐름을 밝게 봤다. 투자 수단으로는 "경기가 회복되고 (금리와) 물가가 오르면 채권시장의 수익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주식 투자를 추천했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국제 금융 도시로서 북경과 상하이 등 본토 도시들의 성장도 눈부시다. 예 회장은 그러나 환경과 날씨를 이유로 홍콩의 위상은 오래도록 변함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베이징은 공해가 너무 심합니다. 공해가 없더라도 날씨가 좋지 않고 풍경이 아름답지 않아요. 상하이는 조금 낫지만 홍콩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그의 지극한 고향 사랑은 홍콩 젊은이들에 대한 질책으로 이어졌다. 세금도 낮고 취업 여건도 유럽에 비하면 훨씬 좋은데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홍콩 대학 중 1~2곳을 제외하면 그리 수준이 높지 않은데도 모두들 졸업하면 바로 높은 급여를 주는 직장에만 줄을 섭니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볼 줄 모르는 것이죠."


    "집값이 비싸지 않냐"고 물으니 "비싸긴 하지만 주택 보유율이 30% 정도 되는 독일을 빼면 집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이 얼마나 되냐"고 반박한다. 여자친구 사귈 때 처음에는 예쁘다고 생각해서 만났다가 주변 친구들이 별로라고 하면 실증을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치인과 언론의 책임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