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6.03 09:17
[1주새 업계 1·2위 규모 M&A]
세계 반도체 1위 美 인텔, 다목적 반도체社 알테라 인수
아바고, 41兆에 브로드컴 인수
주특기 다른 업체끼리 합병… IoT 시대 반도체 융합 예고
메모리 위주 한국, 안심 못해
세계 반도체 업계에 초대형 인수·합병(M&A)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규모 면에서 역대 최대라는 점에서도 시장을 놀라게 하고 있지만, 서로 짝을 짓는 상대들이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세계 반도체 1위 기업인 미국의 인텔은 현지 시각으로 지난 1일 차량·군사·항공용 등 다목적 반도체 전문기업인 알테라를 167억달러(18조원)에 인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인텔의 역대 인수·합병 중 최대이자, 반도체 업계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규모다.
지난달 28일에는 싱가포르의 반도체 기업 아바고가 미국 통신반도체 업체인 브로드컴을 370억달러(약 41조원)에 인수했다. 반도체 업계뿐만 아니라 전체 IT업계를 통틀어도 사상 최대의 거래였다. 채 일주일도 안 돼 반도체 업계 1·2위 규모의 M&A가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지난 3월에는 필립스 반도체 사업부에서 분사한 네덜란드의 NXP가 옛 모토로라 반도체에서 분사된 프리스케일을 118억달러(13조원)에 인수했다. 세 건의 인수·합병 비용 합계만도 72조원에 육박한다.
◇일주일 새 역대 1·2위 M&A
대형 M&A 로 세계 반도체 업계 판도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기존 1등인 인텔은 변함이 없지만 통합 아바고는 매출 140억달러 규모로 세계 6위의 반도체 기업으로 거듭났다. 통신용 반도체만 따지면 퀄컴에 이은 2위로 도약한다. NXP도 이번 M&A로 일본의 르네사스를 제치고 자동차용 반도체 분야 세계 1위에 올랐고, 전체 반도체 순위에서도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
이번 인수·합병 광풍의 배경은 생존 차원의 비용 절감이다. 반도체는 갈수록 작아지고 성능이 좋아지지만 설계 및 제조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예컨대 1971년 인텔이 내놓은 첫 반도체 칩에는 2300개의 트랜지스터가 사용됐지만 인텔의 최신 서버용 반도체 칩에는 그 200만배의 트랜지스터가 들어 있다. 반면 대만과 중국 업체들이 뛰어들면서 가격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어, 몸집을 키워 생산 비용을 낮추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텔의 최고재무책임자(CTO) 스태이시 스미스도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이번 인수·합병은 결국 규모의 경제를 추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때마침 미국 연준이 제로금리 시대를 끝내겠다는 신호를 내면서, 금융 비용이 낮을 때 인수·합병을 하려는 업체들의 발걸음이 빨라진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번 인수·합병 붐을 '규모의 경제'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과거 반도체 업계의 인수·합병은 시장이 겹치는 경쟁 업체끼리 합치는 식이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가 대표적이다. 이번의 경우는 주특기가 조금씩 다른 업체들끼리의 합병이다. 예컨대 인텔은 PC·서버용 CPU의 절대강자이지만, 알테라는 프로그래머블 반도체(제품에 따라 기능을 변경할 수 있는 반도체)가 전문이다. 아바고와 브로드컴은 모두 통신반도체를 해왔지만 아바고는 메모리도 만들고 있다. NXP는 근거리무선통신용 반도체가 주종목인데 프리스케일은 차량용 반도체를 생산해왔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이번 거대 M&A가 반도체 사업의 패러다임 변화에 맞춘 생존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지금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은 서버용, PC용, 모바일용, 가전용, 그래픽용, 자동차용 등으로 제각각 용도가 나뉘고 분야마다 특화된 메이커들이 있었다. 서버나 PC시장에선 인텔이, 스마트폰 시대에 급속히 커진 모바일용 시장에선 퀄컴이 최강자였다. 그러나 모든 IT 기기가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 시대가 다가오면서 이런 칸막이가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기마다 정보의 교환·이동, 해석을 가능케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모바일용 CPU), 센서, 메모리를 갖춰야 하고 종국에는 이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반도체 융합'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를 읽은 반도체 회사들이 서로 다른 분야에서 장점을 지닌 반도체 회사들과 합치고 있다는 것이다.
◇'메모리 왕국'한국도 대비해야
이번의 인수·합병 바람은 메모리 반도체 일변도의 한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지난 30년간 처절한 '치킨게임'에서 승리해 세계 메모리 시장 점유율 합계 70%를 유지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상대적으로 느긋한 표정이다. "분야가 우리와 겹치지 않는 비메모리 분야의 변화"라는 것이다.
IBK투자증권 이승우 애널리스트는 그러나 "이제는 메모리만 잘한다는 것만 갖고는 안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도체가 과거에는 IT산업에 쓰였지만 앞으로 산업 경계가 허물어지면 모든 산업에 다 쓰이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메모리와 비메모리 분야와의 융합도 일어날 수 있어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메모리 시장의 4배에 이르는 비메모리 분야는 사물인터넷, 무인자동차 등이 상용화하면 더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메모리 세계 1위'에만 안주하다가 '반도체 한국'은 결국 반쪽짜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