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6.24 09:47
[메르스와의 전쟁]
해외 출장 연기하고 47회 생일에 첫 기자회견
"아버님도 1년 넘게 병원에… 환자·가족들 고통 이해한다"
정면돌파 방식 문제 해결… "책임경영 본격 시동" 관측
23일 오전 11시 정각. 300여명의 취재진 앞에 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긴장된 표정으로 사과문을 읽어내려 갔다. 이 부회장이 사과 발표 회견은 물론 공식 기자회견에 나선 것은 1991년 12월 삼성전자 입사 이후 처음이었다. 77년의 삼성그룹 역사에서 오너가 기자회견 형태로 공개 사과를 한 것은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1966년 10월)을 포함해 세 번째였다. 사과문을 발표하며 연단에서 두 차례 나와 90도로 허리를 숙인 이 부회장이 "저의 아버님도 1년 넘게 병원에 누워 계신다. 환자 분들과 가족 분들께서 겪으신 불안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때는 목소리가 떨렸다.
◇이 부회장이 직접 사과 '自請'
이 부회장이 직접 공식 사과를 한 것은 삼성서울병원을 통해 메르스에 감염돼 사망한 환자만 10명에 달하는 등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서울병원을 운영하는 삼성생명공익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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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3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5층 다목적홀에서 메르스 사태와 관련한 대국민 사과문을 직접 2분 30여초간 낭독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삼성 내부에서는 이 부회장의 사과문 직접 발표 건을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이 벌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참모들은 "우리가 앞장서서 사과하면 정부에 부담이 될 수 있다" "비슷한 일이 벌어질 때 국회나 시민단체 등에서 이 부회장의 사과를 요구하는 등 부작용이 클 수 있다"는 반대 의견을 냈지만, 이 부회장이 "진정성 있고 책임 있는 사과가 돼야 한다"며 직접 사과를 자청(自請)했다는 후문이다. 지난주 예정됐던 해외 출장을 연기했던 그는 이날 사과문 발표 후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이 부회장의 만47번째 생일이었다. 지난해부터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사실상 삼성을 이끌고 있는 이 부회장은 지금까지 공항이나 삼성전자 사옥에서 만난 취재진의 질문에 한두 마디씩 답변을 하는 정도였다. CNN방송 등 외신도 이런 점에 주목해 이 부회장의 사과 내용을 심야 주요 뉴스로 다뤘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물론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과 미래전략실 각 팀장 등 삼성 수뇌부가 모두 머리를 맞대고 극비리에 발표 문안을 작성했다"며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도 청취했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대(對)국민 사과를 계기로 이 부회장의 책임 경영이 본격 시동을 걸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과거 삼성이라면 이런 일에 오너가 직접 나와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사과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다"며 "이 부회장이 신속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정면 돌파를 택함으로써 그룹 경영에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보였다"고 말했다.
◇메르스 백신·치료제 개발 등 착수할 듯
삼성그룹은 메르스 사태가 수습되는 즉시 '메르스연구재단(가칭) 설립'을 포함한 후속 조치를 내놓을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삼성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부부(夫婦)가 세운 세계 최대 민간 재단인 '빌 & 멜린다 게이츠재단' 사례 등을 집중 연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재훈 삼성서울병원장도 이날 "게이츠재단 같은 곳에서 말라리아나 에이즈 같은 질환을 정복하기 위해 적극 지원하고 있다"며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인 공공 보건에도 기여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삼성 측은 국내 유명 연구소나 해외 전문 연구 기관에 "비용에 구애받지 말고 메르스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해달라"는 용역을 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삼성은 또 삼성서울병원을 상대로 대대적인 경영 진단을 벌이고 외부 전문가를 포함한 '병원쇄신위원회'(가칭)를 구성해 병원 혁신을 꾀할 방침이다. 이를 통해 위기관리 시스템을 고치고 호흡기 감염 환자와 일반 환자의 출입구를 따로 만드는 등 응급 진료 프로세스 전반을 개선할 예정이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직접 사과는 신선했다"며 "앞으로 끝까지 진정성을 갖고 '실제적이고 책임 있는' 개선 방안을 내놓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