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7.22 09:58
일본의 대표적인 정보기술(IT) 기업 도시바를 최근 10년간 이끈 역대 사장 3명이 21일 오후 5시, 한날 한시에 불명예 퇴진했다. 사상 최대 규모인 1조 5000억 원의 분식회계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이 사건을 조사한 제3자 위원회(우에다 히로카즈 전 도쿄 고등 검찰청 검사장)는 경직된 기업 문화를 원인으로 꼽았다. 보고서에 나오진 않았지만 일본 언론들은 사내 파벌 대립과 지나친 이익지상주의도 원인으로 지목됐다.
① '가전계'과 '원자력계'의 파벌 싸움
한 때 노트북 PC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잘나가던 도시바가 왜 이렇게 된걸까. 마이니치신문과 일본 전자 전문잡지 쇼우갓칸 등 일본의 주요 매체들은 제3자위원회의 조사 결과와 도시바 전직 임원의 발언 등을 종합해 경직된 기업 문화와 내부 파벌 대립이 이번 사건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고 보도했다.
도시바의 회계부정 의혹이 처음 불거진 지난 5월 일본 증권거래감시위원회 (SESC)는 제3자위원회에 조사를 의뢰했다. 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특유의 "'상명하복(上命下服)' 식 경직된 기업 문화를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전했다. 보고서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일본 언론은 '가전(PC)계'과 '인프라(원자력)계'로 나뉜 사내 주류 파벌 다툼을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했다.
도시바는 PC 부문 출신의 니시다 아츠토시(西田厚聰) 고문(전 회장)과 원자력 부문 출신의 사사키 노리오(佐佐木則夫) 부회장의 갈등이 심했다. 사사키 노리오 부회장이 사장이던 시절(2011~2013년) 니시다 아쓰토시 전 사장 때 보다 나은 실적을 요구했고 이로 인한 중압감이 회계조작으로 이어졌단 것이다.
쇼우갓칸은 "통상 경영진 간 다툼이 벌어질 때는 각 부문의 실적이 정쟁의 도구가 된다"면서 "상대방에게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부서 실적을 좋게 보이려고 왜곡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일본 재계에서는 '도시바는 사장이 바뀔 때마다 파벌이 바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내부 파벌 대립이 극심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도시바는 1990년대 이후 사장이 PC계와 원자력 계가 교대로 번갈아 했다.
1990 년대 타이조 사장(가전 영업) → 오카무라(사회 인프라) → 니시다 아츠토시(PC) → 사사키 노리오(원자력), 그리고 현재 다나카 히사오(田中久雄-PC 부품 등의 조달) 식이다. 이 회사의 중견 간부는 "가전계와 인프라계는 같은 회사라도 다른 조직"이라면서 "자신이 속한 부문에서 사장이 나오면 보너스도 더 두둑히 나오고 출세도 쉬워진다"고 털어놨다.
일본 언론은 증권거래감시위원회 (SESC)의 내부보고가 당초 인프라 계에 한정됐던 것은 가전계(니시다 파)가 인프라계(사사키 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고발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② 경단련(일본 전경련) 회장을 정쟁이 파벌 불씨
그렇다면 PC 출신 니시다 고문(전 회장)과 원자력 출신의 사사키 부회장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진 계기는 무엇일까. 일본 언론은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經團連) 회장을 둘러싼 정쟁이 불씨가 됐다고 봤다.
경단련은 일본 최대의 경제단체로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과 비슷한 조직이다. 경단련 회장은 일본 내에서 '재계 총리'로 불릴 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
니시다 고문은 회장을 역임하던 2009년 경단련 부회장에 취임하며 유력한 회장 후보로 거론됐다. 하지만 당시 오카무라 고문(인프라 계-전임 회장)이 일본 상공 회의소 회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일본 경제 3 단체장 2 명을 동시에 같은 기업 출신이 맡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오카무라 고문이 물러서지 않아 결국 니시다 고문(당시 회장)은 전경련 회장 자리에 고배를 마셔야 했다.
도시바의 한 전직 임원은 쇼우갓칸에 "니시다 고문은 전경련 회장 자리만큼은 원자력계인 사사키 부회장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2013년 니시다 회장은 사사키 회장을 부회장으로 좌천시켰고, 2014년에 자신이 고문으로 물러난 후에도 후임으로 사장 경험이 없는 무로마치 당시 이사를 자신의 오른팔(반도체 계)라는 이유로 승진시켰다"고 덧붙였다.
③ 일본 특유의 '상명하복(上命下服)' 식 기업 문화
제3자 위원회는 지난 20일 공개한 보고서에서 도시바 각 부문별 책임자는 최고 경영진이 내린 실적 목표는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고 전했다. 임원진은 각 사업 부문 책임자에게 '챌린지(challenge·도전)'라는 이름의 과도한 수익 목표를 설정해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몇몇 부서에선 결산까지 3일만 남은 시점에 120억 엔의 수익 개선을 강하게 요구했다. 결국 사업 부서장들은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비용 계상을 미루거나 이익을 과다계상하는 방식으로 회계 부정을 저질러 왔다.
도시바의 전직 임원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졌을 때 원자력계에서 이 사고가 실적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나머지 스마트미터기나 전자톨부스 같은 실현불가능한 사업들을 대거 내놨다고 털어놨다. 보고서엔 후쿠시마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특히 이 같은 회계부정은 2011년과 2012년에 집중됐다.
뿐만 아니라 도시바는 한 지방자치단체가 발주한 시스템 장치 제조를 수주했을 때 담당 부문은 낙찰 받기 위해 구체적인 실현 대책도 없는 비용 절감 방안이 포함된 '챌린지'를 설정한 뒤 입찰 가격을 적어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위원회가 도시바의 기업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지적한 데 따라 도시바는 앞으로 닛산 자동차의 카를로스 곤 CEO와 같은 외부 경영자를 영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도시바의 다나카 히사오 현 사장은 물론, 전 사장 사사키 노리오 부회장, 전전사장인 니시다 아츠토시 고문은 이날 분식회계에 책임을 지고 모두 물러났고, 사사키 노리오 부회장은 이날 경단련의 부회장도 사퇴했다.
경단련은 내년 6월로 예정된 정기 총회까지 14인 체제로 당분간 유지된다. 사사키 부회장은 지난 2013년 6월 경단련 부회장으로 취임했으며, 세제위원장과 일본-러시아 경제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