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금융' 10곳중 7곳, 무늬만 바꾼 기존대출

    입력 : 2015.09.08 09:36

    [은행들 하소연 "정부가 실적 닦달하니…"]


    은행들 우량중기 찾아가 "기술금융으로 바꿔달라"
    "신용등급 낮은 곳 대출은 돈 떼일 위험 커 안돼"
    기술력 보고 대출 40%뿐


    울산에 있는 A은행 이 모 지점장은 "지난해 본점에서 기술금융 실적을 올리라고 닦달을 해서 기존 거래업체들에 SOS를 쳤다"고 털어놨다. 그는 10개 거래업체에 연락해 "2주 정도 소요되는 간단한 기술력 평가만 받으면 0.5~1%포인트의 대출 우대금리를 적용해 주겠다"고 설득했다. 해당 업체들은 "저금리로 대출금리가 낮아져 담보대출 받으면 금리에 큰 차이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이 지점장은 "사정을 봐서 한 번만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이 업체들은 대부분 부채비율이 30% 이내, 신용등급 BBB 이상의 우량 중소기업들로, 기술금융 제도를 통해 만기 후 재대출을 받았다고 했다. 이씨는 "정부에서 기술금융 실적을 압박하는데, 신생기업들은 돈을 떼일 위험이 커 어쩔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담보가 부족한 중소 벤처기업들에 기술력을 평가해 자금을 지원해주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은행권의 기술금융 제도가 '무늬만 기술금융'인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금융은 지난해 7월부터 지난 6월까지 42조원이 실행됐을 정도로, 양적으로는 급팽창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기존 우량 거래기업에 지원이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술금융 지원기업 10곳 중 7곳이 기존 대출 기업


    7일 신학용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은 기술금융 현황 자료를 보면, 지난 6월 말 국내 17개 은행의 기술금융 대출 비중에서 75.4%가 기존 거래기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7월 최초 기술금융 제도가 도입됐을 때의 58.6%보다 대폭 늘어난 것이다. 부산은행(94.5%), 기업은행(90.1%), 우리은행(83.3%), KB국민은행(82%) 등에서 기존 거래 기업 비중이 특히 높았다. 전북은행(49%), 제주은행(44%) 등 일부 지방은행들만 신규 기업에 대출을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들은 기술평가기관인 나이스신용평가정보·한국기업데이터 등에 대출 대상이 되는 기업의 기술력을 평가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출을 실행한다. 그러나 실제 기술력만 보고 신용대출을 해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출 42조원 가운데 순수 신용대출은 16조8782억원으로, 전체 대출의 40%에 머물렀고 나머지는 담보·보증 대출이었다.


    은행들이 지원한 기업은 대개 은행들이 우량 신용등급으로 분류하는 BBB등급 이상이었다. 신한은행은 BBB등급 이상 대출 건수가 2220건으로 전체 2450개 중 90%를 차지했고, 기업은행도 78.7%, 우리은행도 61%에 달했다. 반면 CCC등급 미만의 투자부적격 기업들은 대출 실적이 미미했다.B은행 관계자는 "BBB등급 이상의 기업은 대부분 중소·중견기업으로 굳이 기술평가를 받지 않아도 3~4%대의 낮은 신용대출이 가능하다"며 "기술력이 좋은 창업기업은 신용등급이 낮거나 무등급이라서 처음부터 말도 잘 안 꺼낸다"고 말했다.


    ◇은행들 "기술만 믿고 대출해주기 어렵다"


    은행들은 신생 창업기업들은 신용등급이 낮아 은행의 재무건전성 지표를 악화시키는 문제가 있다고 해명하고 있다. C은행의 한 지점장은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에 기술금융을 해주면, 그만큼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해서 은행 건전성 지표인 자기자본비율(BIS)을 해친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금융위원회는 하반기부터 기존 거래기업에 대해 기존 대출 대비 증가한 금액만 기술금융 실적으로 평가하고, 양적 평가보다 질적 평가 비중을 확대해 신생기업 지원을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될지 의문이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대출이자가 유일한 수익인 은행은 100개 중 5개 기업만 망해도 재무 건전성에 빨간불이 켜지지만, 기업에 지분을 투자하는 벤처캐피털은 100개 중 99개 기업이 망해도 1개만 큰 성공을 거두면 손실을 상쇄할 수 있다"면서 "벤처캐피털을 통한 지원을 더 늘리는 정책 선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