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0.05 09:19
[재계 인사이드] 해외 상장 추진, 자진 상장폐지도
요건 갖춘 600개 기업 중 작년 상장한 곳은 7개사뿐
"증권시장이 자금조달보다 자금 유출 창구로 전락…"
경영권 안정장치 마련 시급
이랜드그룹은 총자산이 7조원에 달하고 계열사가 25개에 이르는 재계 30위권의 대기업이지만, 상장사는 이월드(우방랜드) 한 곳뿐이다. 이마저도 그룹에 편입되기 전에 유가증권시장에 기업공개를 했고, 이랜드파크·이랜드월드·이랜드리테일 등 주요 계열사는 아직도 비상장 상태다. 자금 여력이 충분한 데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만큼 '족쇄'가 될 수 있는 상장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현대카드도 2000년대 초반부터 상장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비상장 기업이다. 국내외에서 좋은 조건에 회사채 발행에 성공하면서 "굳이 상장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가 회사 안팎에서 나온다. 알짜 중견기업인 SPC그룹도 활발하게 해외로 진출하고 있지만 상장은 아직 먼 얘기다.
기업들의 규모와 실력, 신용도 등을 보여주는 척도로 꼽히던 상장(上場·기업공개·IPO)이 최근 외면당하고 있다. 증시 상장을 꺼리는 것은 기본이고 자진 상장폐지를 결정하는 곳이 잇따르고 있다. 상장회사협의회 로고를 회사 이름 옆에 넣고 자랑하는 광고도 찾기 힘들다. 벤처·스타트업(신생기업)들은 상장을 하더라도 미국 나스닥 등을 더 선호하고 있다.
◇"上場하면 경영간섭 많고 자금유출"
SK그룹의 유선통신 전문기업인 SK브로드밴드는 올 6월 증시에서 자취를 감췄다. 신사업 추진을 위해선 비상장 기업 형태가 더 낫다는 판단 아래 상장을 자진 폐지한 것이다. 지난해 초 도레이첨단소재로 주인이 바뀐 도레이케미칼(옛 웅진케미칼)도 상장폐지를 추진 중이다. 사모펀드가 최대주주가 된 경남에너지·동일제지 등도 증시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주인이 외국계로 바뀐 기업에서 상장폐지는 '통과의례'가 됐다. 미국 이베이가 인수한 온라인 쇼핑업체 옥션과 디지털 도어록 전문업체 아이레보, 브라운관으로 유명했던 한국전기초자 등이 대표적이다. 2007년 국내증시 상장 1호 외국기업으로 주목받던 3노드디지탈을 포함한 상당수 기업들도 국내 증시에서 철수했다. 재계 관계자는 "증시 상장 폐지는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주주(株主) 간섭이 덜한 비상장 업체가 유리한 데다 배당 압력 등도 피하려는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본사가 미국에 있는 쿠팡은 물론 배달의민족 같은 토종 벤처들도 나스닥 상장을 타진하고 있다. 한 벤처 기업가는 "자금 유치와 해외 공략을 위해 해외 상장이 훨씬 더 낫다"고 말했다.
◇지난해 600기업 중 실제 上場은 7개사만
전경련 조사를 보면 지난해 유가증권시장 상장 요건을 갖춘 600개 기업 가운데 상장을 한 곳은 7개사(1.17%)뿐이다. 이는 증권시장이 자금 조달 역할은커녕 '자금 유출 창구'로 전락한 탓이라는 지적이다. 2000년 이후 증시를 통해 조달된 자금은 6조6000억원인 반면, 같은 기간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위해 기업에서 빠져나간 자금은 18조6000억원에 달했다. 1990년대 말 자본시장 개방 이후 경영권 안정을 위한 제도 마련이 미흡했던 탓이다. 삼성물산이 최근 해외 사모펀드인 엘리엇의 공격으로 곤욕을 치른 게 이를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상장사들이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증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선진국에만 있는 차등의결권제(일부 주식에 특별히 많은 수의 의결권을 주는 제도), 황금주(黃金株·주식 한 주만으로 주요 경영사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제도), 포이즌필(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훨씬 싼값에 새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주는 제도) 같은 제도를 도입해 한국 증권시장의 매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송원근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기업들이 증시에 서로 뛰어들어오도록 다양한 종류의 주식 도입을 위한 상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