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일자리 창출" 압박에... 10大 그룹, 계약직만 늘렸다

    입력 : 2015.10.13 09:24

    [비정규직 600만명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와 청년 일자리 늘리기 정책… 계약직 급증의 주요인으로
    "외형 숫자에 집착하다가 질 낮은 일자리 늘어" 지적… 시간제 정규직 확대 필요


    2010년 말 1369명이던 삼성전자의 계약직원은 올 6월 말 현재 2543명으로 집계됐다. 5년 만에 2배 정도로 늘어난 것이다. 반면 같은 기간 이 회사의 정규직원은 2% 정도 늘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지난해 비서 등 정부의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 정책에 부응하다 보니 계약직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시간제 일자리' 등 정부의 일자리 확대 정책이 정부의 당초 의도와 달리 국내 대기업에서 계약직 고용을 부채질하고 있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고용률 70%'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업들을 몰아붙이다 보니 질(質) 낮은 계약직 일자리만 늘고 있다는 것이다.


    본지가 12일 국내 기업들이 계약직 현황 공개를 시작한 2010년 사업보고서와 올해 반기(半期)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현대차와 SK텔레콤, 포스코 등 10대 그룹 주요 기업들이 최근 5년간 계약직 고용을 대거 늘린 것으로 파악됐다. 같은 기간 정규직 고용은 정체됐거나 더 줄었다. 국내 비정규직 종사자가 지난해 600만명을 넘어선 상황에서 '안정적인 일자리'의 대명사인 10대 그룹에서도 계약직이 유독 늘어난 것이다.


    ◇정규직 그대로, 계약직만 늘어


    재계에서는 2013년 하반기 정부가 추진한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 정책을 대기업 계약직 급증의 주요인으로 꼽는다. '시간선택제 일자리'란 기본 근로조건이나 복리후생에 차별을 받지 않으면서 파트타임처럼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선택하는 고용 형태를 말한다. 같은 해 11월 삼성그룹이 총 6000명을 뽑기로 한 데 이어 LG, 포스코 등 대기업도 앞다퉈 '시간제 일자리' 확대를 선언했다. 그 결과 최근 2년 새 계약직 직원 숫자가 급증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무역학)는 "대기업은 그동안 꾸준히 비정규직을 줄여왔는데, 최근 정부가 단기(短期) 성과에 집착하다 보니 계약직을 급히 늘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년 일자리 늘리기 정책도 계약직 증가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대기업들이 이런 정책에 호응하기 위해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한 인턴 규모를 확대하면서 계약직 일자리가 늘었다는 것이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지난 5년 사이 계약직 숫자가 5배 정도 불어난 것은 인턴 채용 탓이 크다"고 말했다.


    포스코, 현대중공업 등 현장 생산직이 많은 곳은 임금피크제와 유사한 '퇴직 후 재취업' 제도가 영향을 줬다는 지적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2011년부터 정년퇴직 후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새 제도를 시행하면서 해마다 본사에서만 400~500명의 퇴직자를 계약직으로 고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사내 하도급 인력을 자체 계약직으로 전환(현대차)하거나, 퇴직자를 계약직으로 채용해 해외 플랜트에 파견하면서 계약직이 크게 늘어난 경우(현대중공업)도 있었다.


    ◇"시간제 정규직 등으로 '質 좋은 일자리' 늘려야"


    대기업 계약직 증가에 대해 청년 실업과 경력단절 여성이 사회문제로 대두하는 현실에서 어떤 형태로든 일자리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지나치게 외형 숫자에 집착하면서 '질(質) 낮은 일자리'를 늘렸다는 비판론도 제기된다. 산업연구원(KIET)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은 평균 9800원으로 정규직(1만5300원)의 64%에 그쳤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삼성 등 대기업들은 시간제 일자리 확대 과정에서 신규 고용 인력에 줄 마땅한 직무가 없어 목표를 채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정규직을 늘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 정책이 숫자 늘리기보다 정규직 위주의 양질(良質)의 일자리 창출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장 풀타임(full-time) 정규직을 늘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시간제 정규직'을 점차 확대해 나가는 방식의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재민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유럽 등 선진국은 전문직과 사무직을 중심으로 시간제 정규직이 보편화돼 있다"며 "국내 근로 문화에선 낯설지만 이런 정규직 자리를 점차 늘려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