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1.03 09:59
[3조5000억원 시장 놓고 밥그릇 싸움… 소비자만 불편]
자동차관리법 개정하고도 정부, 넉달 넘도록 고시 안해
"한국만 너무 앞서간다" 수입차 업계 시행 연기 요구
정비업계는 "사실 호도해"
국회와 정부가 올해 수입차의 불편한 정비 서비스와 비싼 수리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동네 카센터에서도 수입차를 정비할 수 있도록 법령을 통과시켰지만, 4개월이 넘도록 시행되지 않고 있다. 수입차 업계가 "한국 정부가 너무 앞서간다"며 시행 유예를 요청하자 관련 부처인 국토교통부가 시행 시점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내 정비업체와 소비자단체들은 소비자 불편 해소를 위해 정부가 하루빨리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하고 있다.
◇告示 발표 지연이 핵심 원인
올 한 해 20만대 정도의 수입차가 팔릴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22개 수입차 업체가 전국에 운영하는 공식 정비소는 376곳뿐이다. 이 중 종합 정비소는 174곳이며 나머지 202곳에선 소모품 교환과 간단한 정비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수입차 소비자들은 정비소를 찾고 수리를 맡기는 데 큰 불편을 겪고 있다. 수리에 걸리는 시간은 국산차의 2배 정도 길고, 공임(工賃)비와 부품값 등은 국산차에 비해 3배 가까이 비싸다. 2년 전 수입차를 산 이모(43)씨는 "올해 초 리콜(시정조치) 공지를 받았지만 정비소까지 찾아가기도 힘들고 수리 시간도 너무 오래 걸려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를 감안해 국회와 국토교통부는 3년 이상 수입차 업계와 승강이를 벌여 올 7월 동네 카센터에서도 수입차 정비를 받을 수 있도록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넉 달이 지나도록 시행이 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동네 카센터에서도 수입차 서비스가 가능하려면 수입차 업체들이 먼저 정비 매뉴얼, 고장(故障) 진단기 등 정비에 필요한 정보나 장비를 민간에 공개해야 한다. 이 정보가 있어야 동네 카센터에서도 고장 원인을 파악하고 수리를 한다. 하지만 국토부는 법 개정에 따른 시행규칙까지 통과시켜 놓고도 수입차 업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무슨 정보를 공개할지 등 구체적인 절차와 시행 시점을 담은 고시(告示)는 아직 발표하지 않고 있다. 국내 정비업체와 수입업체 간 이해가 엇갈리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파악한 뒤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수입차·정비업계 팽팽한 줄다리기
수입차 업계는 이 제도의 시행을 늦춰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에서도 차량 정비에 관련된 정보를 2018년부터 공개하는데 한국 정부가 추월해 간다는 이유에서다. 한 수입차 업계 관계자는 "일부 진단기 정보는 업체별 핵심 정보인데 그냥 공개할 경우 악용(惡用)될 가능성이 있다"며 "보안 체계가 갖춰질 때까지 유예 기간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수입차 업계는 국토교통부 고시가 확정될 때까지 수입차 정비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국내 정비업계 측은 수입차 업체들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반박한다. 윤육현 자동차전문정비사업조합연합(카포스) 회장은 "미국은 2003년부터 환경보호국(EPA) 법에 따라 자동차 정비 매뉴얼과 고장진단기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며 "2018년부터 시행한다는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법은 일반 소비자들이 집에서도 자가(自家)정비를 할 수 있도록 범용 진단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과 관련된 일종의 별도 법안"이라고 말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업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에 문의해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며 "최대한 올 연내에 시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돈 내는 소비자만 호구"
수입차 수리 논란이 가열되는 것은 3조5000억원에 달하는 방대한 수입차 정비·수리 시장 때문이다.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지난해 수입차 1회 평균 수리비(274만7000원)는 국산차(95만2000원)의 3배 수준이다. 부품 가격도 2배 정도 비싸다. 정비·수리 분야가 수입차 업계의 주 수익원이라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금융감독원 공시 자료 등을 살펴보면 수입차 업체의 판매법인 영업이익률은 2~3%이지만 부품과 정비 사업 법인은 30% 정도 영업이익을 남기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윤 한국소비자원 자동차팀장은 "한국 수입차 소비자들이 언제까지 정비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국토교통부가 고시를 발표하지 않아 개정안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