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압박에 고달픈 은행원 "매일매일 미션 임파서블"

    입력 : 2016.01.12 09:27

    [계좌이동제 시행후 은행간 '통장 뺏기 경쟁'… 친척·친구 총동원]


    저금리·저성장에 수익 떨어져 자동이체·카드·펀드 유치 전쟁, 개별 실적 공개해 경쟁 부추겨
    작년말 희망퇴직 칼바람 이어 연봉제 확대도 발등의 불
    '성과주의 저지' 공약 내세운 강성 노조위원장 잇달아 당선


    "오늘 중에 자동이체 계좌 5건씩 책임지고 끌어와라."


    서울 시내 한 은행 지점장은 최근 직원당 자동이체 계좌 5건씩을 하루에 달성하라고 지시했다. 갑작스러운 요구에 직원들은 가족·친척·친구 등 지인들을 총동원해 할당량을 채웠다. 한 직원은 "점심도 거른 채 하루종일 전화만 돌렸다"면서 "요즘 매일매일이 영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불가능한 임무)'의 장면 같다"고 말했다.


    이런 풍경은 작년 10월 주거래 은행을 바꾸면 모든 자동이체 계좌가 옮겨지는 계좌이동제가 시행된 후로 시중은행 지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자동이체가 붙어 있는 270조원의 예금 시장을 둘러싸고 은행원들 간의 '통장 뺏기 전쟁'이 벌어졌다. 수수료 면제, 금리 우대 등의 미끼로는 경쟁사와 차별화가 어려워지자 '친·인척 총동원령'까지 발동하는 은행이 많다.


    은행권은 작년 말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인 3600여 명이 희망퇴직하는 칼바람을 겪었다. 살아남은 행원들은 실적 압박과 경비 절감 요구 등 찬바람에 시달리고 있다. 저금리로 은행권 수익이 줄어드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어제까지 함께 일하던 동료가 회사를 나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지만 고개를 돌려 현실을 보면 냉혹한 현실에 정신이 번쩍 든다"고 말했다.


    ◇매일 '실적 인민재판' 벌어지는 은행 지점들


    A은행 윤모 대리는 요즘 영업 종료 시간이 두렵다. 매일 팀장에게 카드·펀드 판매 실적을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불려가 지적당할 때가 훨씬 많다. 며칠 전에도 팀장으로부터 "○○지점 누구, 네 동기 아니냐? 걔는 어제 카드 몇 장을 팔았다더라. 우리 지점이 그 지점보다 손님도 훨씬 많은데 너는 뭐하는 거냐"는 핀잔을 들었다. 어떤 날은 "오늘 무슨 일 있었냐. 실적이 왜 이러냐. 너 카드 팔 때 어떻게 하는지 내가 손님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팔아봐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개별 실적을 공개해 경쟁을 부추기는 경우는 다반사다. 한 지점장은 실적이 마음에 드는 직원이 있으면 "△△△씨, 오늘 카드 5장 했습니다"라고 외친다. 사내 메신저로 '아무개는 펀드를 200만원이나 했다'고 쪽지를 돌리기도 한다. 실적이 조금이라도 부진하면 따로 불러 압박을 가한다. 입사 2년 차인 김모 사원은 "은행이 이렇게 힘든 곳인 줄 몰랐다"며 "실적이 공개될 때마다 인민재판을 받는 느낌이다"고 말했다.


    은행들이 이처럼 은행원들에게 실적 압박을 가하는 것은 저금리와 저성장으로 은행의 수익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2005~2010년 은행의 수익은 연평균 7.4% 성장했다. 그러나 2011~2015년엔 연 3.7%씩 수익이 오히려 줄었다. 같은 기간 저축은행(12.3%)·자산운용(5.5%)·생명보험(4.6%) 등의 수익이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경비 절감 요구도 거세지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영업점별로 구매하던 고객 사은품을 최근 본부에서 통합 구매한다. 조금이라도 구매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작년 9월엔 '비용 다이어트'라는 아이디어 대회를 개최해 5000여 건의 의견을 접수받아 적용 여부를 검토 중이다. 우리은행은 올해 점포수를 40여 개 감축할 계획이다. 점포 한 곳당 임차료·관리비 등으로 연 10억원이 소요된다고 봤을 때 약 400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김우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 은행은 고객이 최대한 확대된 상태라 수익을 높이려면 기존 고객을 쥐어짜는 수밖에 없다"며 "펀드나 방카슈랑스 등을 들이밀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니 영업직원들의 피로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연봉제 확대 등 찬바람 더 거세질 듯


    그동안 은행권은 연공서열 위주의 호봉제를 기본으로 해서 월급을 받아왔다. 성과에 따른 차이는 크지 않았고, 지점이나 부서별 집단 평가이기 때문에 같은 지점이면 모두 같은 등급과 그에 따른 성과급을 받았다. 이러다보니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동료들에게 업혀간다"는 직원도 생겨났고, 은행의 생산성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금융 당국은 금융개혁 방안의 하나로 은행권 성과주의 확산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급 비중을 낮추고 성과급 비중을 높이는 것과, 집단 평가 대신 개인별 실적 평가를 통해 각자의 성과에 따른 연봉을 지급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은행원들은 노조를 중심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신한·기업 등 은행에선 잇달아 '성과주의 저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강성 노조위원장들이 당선됐다. 경기도의 B은행 한 지점 부지점장은 "기업 구조조정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치 내 얘기 같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며 "노조를 통해서라도 불안한 미래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