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3.04 10:06
[창간 96 특집] 세계 미디어, 첨단 기술과 결합
- 안방서 뉴스 현장 느끼는 'VR'
"트럼프 유세장 와 있는듯 생생" NYT·NHK 등 VR 뉴스 박차
- 자동으로 기사 쓰는 '인공지능'
AP통신, 인공지능 SW 활용해 세계 주요기업 실적 기사 작성
- 접근하기 힘든 곳엔 '드론 기자'
톈진 항구 폭발·체르노빌 모습, CNN·CBS 등 취재에 적극 활용
'5000명 이상이 꽉 들어찬 미국 중소 도시의 체육관.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중앙 연단에 올라왔다. 트럼프가 "더 크고, 더 나은 위대한 미국을 만들겠다"고 외치자 내 옆자리에 있는 백인 남자가 '트럼프'를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체육관은 트럼프 연호로 가득 찼다. 뒤를 돌아보니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 찍기에 바빴다. 트럼프가 단상에서 내려와 지지자와 악수를 하면서 바로 내 눈앞까지 걸어왔다. 주변에서는 모두 트럼프의 손을 잡아보기 위해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머리에 썼던 가상현실(Virtual Reality·VR) 기기를 벗자 트럼프의 유세 현장에서 서울 태평로에 있는 조선일보 편집국으로 돌아왔다. 앞서 장면은 미국 뉴욕타임스가 최근 '도전자들(The Contenders)'이란 제목으로 내놓은 'VR 뉴스'를 체험해본 것이다. 가상현실이란 컴퓨터 기술로 사람의 시각·청각 등을 자극해 실제와는 다른 장소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을 주는 것을 말한다.
◇가상현실·인공지능·드론… 테크 저널리즘 시대 열렸다
전 세계 미디어는 VR과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AI), 드론(Drone· 무인 비행기) 등 첨단 기술과 결합한 '테크(Tech·기술) 저널리즘'을 앞다투어 도입하고 있다. 산업혁명 때 등장한 증기기관과 같이 이런 신기술은 저널리즘과 미디어 시장의 본질적인 변화를 낳을 것으로 전망된다.
가상현실 뉴스는 독자를 뉴스의 현장 속으로 데려가서 생생한 체험을 하게 해준다. 360도 카메라로 사건·사고 현장을 촬영한 뒤 VR 기기를 쓰고 영상을 보면 전후좌우, 상하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 방향의 영상이 나타난다.
뉴욕타임스는 작년 11월 100만명이 넘는 독자에게 보급형 VR 시청 기기를 무료로 제공했다. 이와 함께 난민촌 아이의 현실을 다룬 '쫓겨난 이들(The Displaced)' 등 VR 기사를 연이어 내놨다. 월스트리트저널과 영국 가디언, 일본 NHK 등 주요 신문·방송사도 뉴욕타임스의 뒤를 이어 VR 뉴스를 내놓고 있다.
인공지능 소프트웨어(SW)가 간단한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이미 현실화됐다. AP통신의 경우 '워드스미스'라는 인공지능 SW를 사용해 전 세계 주요 기업의 실적을 취재·분석하는 기사를 쓴다. 이 SW는 매 분기당 4300건의 기사를 작성한다. LA타임스, 포브스, 로이터, 블룸버그 등도 인공지능을 활용해 자동으로 기사를 쓰고 있다.
인공지능 SW가 기사를 쓰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먼저 기업의 보도 자료나 주식시장 공시, 주가 등의 기본 자료를 입수한다. 복잡한 숫자와 기호가 많은 자료 속에서 무슨 데이터가 중요한지, 의미는 무엇인지까지 파악한다. 그다음엔 미리 유형별로 정해놓은 기사 작성 원칙에 따라 문장을 쓰게 된다.
미국 CNN, CBS와 영국 BBC 등 방송사들은 드론을 뉴스 취재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CNN은 작년 8월 중국 톈진 항구의 대폭발 때 드론으로 현장을 취재했다. CBS의 시사 프로그램 '60분'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유령 도시가 된 프리피야티 지역의 모습을 2년 전에 처음 보도하기도 했다. 현장 근접 취재는 공중을 떠다니는 '드론 기자'가 담당했다.
고려대 김성철 교수(미디어학부)는 "첨단 기술을 활용해 뉴스를 제작하는 테크 저널리즘이 활성화되고 있다"며 "이 분야에 먼저 투자하고 이끄는 기업이 새로운 미디어 생태계의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기술 활용해 고품질 뉴스 전달
테크놀로지와 저널리즘의 결합에 대한 우려도 있다. 뉴욕타임스 잡지 부문의 제이크 실버스타인 편집국장은 "그동안 모든 기사엔 기자의 관점(framing)이 존재했지만 VR 뉴스엔 그런 것이 없다"고 말했다.
예컨대 신문 기사는 CCTV나 녹음기처럼 사건 현장을 그대로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취재 기자의 시각에서 사건을 분석하고 정돈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VR 뉴스는 그런 것 없이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다. 현장 느낌은 훨씬 생생하지만 기자의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또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이 취재 기자를 대체하는 데 대한 우려나 드론의 사생활 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취재 영역과 방식을 무제한으로 넓힌 테크 저널리즘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전자공학과)는 "기자들이 인공지능 같은 기술의 발달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며 "통찰력과 분석 능력을 갖춘 저널리스트가 신기술의 도움까지 받으면 최고 품질의 뉴스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