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로 양산할 6세대 128단 1Tb TLC 낸드플래시와 개발중인 솔루션 제품들/ SK하이닉스 제공
일본정부의 경제 보복으로 수년전부터 거론돼왔던 우리나라의 반도체 장비·소재 국산화의 중요성이 다시 일깨워지고 있다. 당정청은 3일 반도체 장비, 소재 국산화에 매년 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뒤늦은 조치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듯하다.
한국은 세계 1위 반도체 국가이지만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소재와 장비는 외국산에 80% 의존하고 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지난 2017년 기준 국내 반도체 소재 시장 규모는 73억원으로 세계시장의 약 9.9%를 차지하고 있지만 국산화율은 50.3% 수준이다. 반도체 장비 시장 규모는 97억원으로 세계시장의 10.1%를 하지하고 있지만 국산화율은 18.2%로 더 낮다. 이 수치는 10년 전과 비슷하다. 2000년대 들어 장비 국산화에 민간 기업과 정부가 힘을 쏟았지만, 정체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또 지난해 반도체 장비 수입액은 155억달러를 넘어, 휴대전화 수출액의 1.1배에 달한다. 주요 수입국은 일본(45%), 네덜란드(25%), 미국(24%) 등이다. 장비 수출은 35억 달러이지만 대부분 국내기업의 해외 공장으로 공급하는 비율이 높다. 장비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4배가 넘는 것이다. 반도체 소재에서 일본 의존도는 50%에 육박한다. 국내에서 반도체 소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실리콘 웨이퍼의 수입액은 지난해 16억1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장비와 소재산업을 놓고 살펴보면 첨단공정에 투입되는 핵심 장비 대부분을 외국 업체들이 독점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 업체들이 집중하는 '후공정'의 경우 '전공정' 대비 기술 장벽이 낮아 중국 업체들의 추격이 거세다.
반도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설계 ▲공정 ▲제품 ▲소자 등 4개 과정을 거친다. 이 가운데 반도체가 만들어지는 건 '공정'에 해당하는 단계로 노광·식각·확산·박막증착·세정·화학 및 기계적 연마 과정이 있다. 후공정으로 불리는 커팅과 테스트, 패키징 등은 공정 과정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후공정에 해당하는 제품 과정으로 분류되는게 합리적이다.
반도체 업체들이 선진공법을 위해 집중하는 과정은 노광과 증착에 해당한다. 특히 10나노 이하 미세공정을 위한 첨단 노광장비는 네덜란드, 일본, 미국 업체가 독점하고 있다. 반면 한국 업체들은 절단과 세정 등 후공정에 경쟁력이 있다.
문제는 중국 업체들의 추격이 거세지면서 한국 업체들의 경쟁력이 오래가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대규모 투자를 통해 '반도체 굴기'를 현실화하고 있다. 수 년 내 중국 반도체장비 매출액은 한국 시장을 추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반면 노광과 증착 등 선공정의 기술 격차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돼 한국 업체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원천기술이 없는 데다, 투자비 부담, 핵심 부품의 해외의존 등으로 저부가 시장 중심으로 성장했고 전 공정 장비 중 증착(웨이퍼 위에 특정 용도막 증착), 세정, 열처리 등을 중심으로 일정 부분만 경쟁력을 확보했다. 다만 후공정 장비 기술 수준은 해외 선도기업 대비 80~90%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화공약품은 공급 안정성 확보, 물류비용 절감 등을 위해 국산화가 추진됐지만, 노광 공정 소재 등은 원천기술 미확보로 해외 의존도가 높다. 특히 EUV용 첨단 소재 등은 원천기술 부재로 해외기업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다. 또한 반도체 웨이퍼 세정, 식각공정에 사용되는 고순도 불산(플루오린화수소산)은 일본기업으로부터 90% 이상을 구매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전문가들은 결국 이 같은 일본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소재 및 장비 국산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일본의 경우 반도체 사업에 처음 진출했을 당시 소재·재료·장비 사업을 함께 시작했다”며 “그 원천 기술과 노하우를 우리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더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연 IBK경제연구소 산업연구팀 연구위원도 “한국은 소재·장비 시장에 과감히 투자해 일본을 따라잡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현재의 실적에 취해 있게 된다면, 향후 2~3년 이내에 반도체 산업마저 중국에 추월당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문가는 "정부가 산업의 기본 토양인 학계의 인재양성을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지원해야 하고 미국, 유럽, 일본 장비사의 R&D센터를 적극 유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를 중심으로 기술개발을 위한 정부차원의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내 일부 업체가 선공정에 해당하는 식각·연마 장비를 개발한 것과 같은 성과가 꾸준히 나오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는 올해부터 매년 1조원 수준의 집중투자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청와대는 이날 일본의 수출규제 대응 방안과 관련,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개발에 매년 1조원 수준의 집중투자를 현재 추진하고 있고, 이에 대해 예비타당성조사(예타) 중"이라고 밝혔다.
조정식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정부는 차제에 우리 반도체 산업의 핵심 소재·부품·장비 개발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경쟁력 강화 계기로 삼겠다는 계획이 있다"며 "이달 중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별도로 발표할 예정" 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