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환경에서 먼저 달리고 3D 프린팅으로 부품 만들고 전장까지 검증
개발 기간 단축부터 오류 최소화까지…자동차 연구개발 패러다임 변화
남양기술연구소 전경. /현대차 제공
전동화와 소프트웨어 기술의 발전으로 자동차를 개발하는 방식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실차 제작 이전 단계에서 성능과 품질을 디지털 환경에서 검증하고, 적층 제조를 활용해 부품을 제작하며, 전기·전자 시스템까지 사전에 시험하는 개발 체계가 진화하고 있다. 전기·전자 시스템 역시 차량이 완성되기 전 미리 시험·검증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미래 모빌리티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해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현대자동차·기아의 연구개발(R&D) 거점인 남양기술연구소가 있다.
1일 방문한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남양기술연구소. 이곳에서는 미래 기술 개발과 검증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드라이빙 시뮬레이터와 디지털 측정 센터(DMC), 적층 제조 솔루션 센터(AMSC), 노바 랩(NOVA Lab)에서 연구원들은 각종 데이터와 씨름하며 현대차그룹의 경쟁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남양기술연구소 드라이빙 시뮬레이터 외관. /현대차 제공
부품 교체 없이 수초 만에 비교…개발 기간 줄이는 드라이빙 시뮬레이터
드라이빙 시뮬레이터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270도 곡면 스크린 한가운데 놓인 운전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구원이 운전석에 앉아 가속 페달을 밟자 화면 속 시험장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코너를 돌 때마다 콕핏은 차체의 움직임에 맞춰 기울었다. 노면의 미세한 진동과 원심력에 따른 차체 거동까지 실제 차량을 모는 듯 몸으로 전달됐다.
정필영 주행성능컨셉개발팀 책임연구원은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는 다양한 가상환경에서 운전자가 직접 차량의 주행 성능을 평가하는 장치"라며 "실제 차량을 제작하기 전 차량 수학 모델과 정밀지도를 기반으로 성능을 검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장비는 전후·좌우·상하 움직임과 롤(Roll), 피치(Pitch), 요(Yaw)를 구현하는 6자유도(6DOF) 모션 시스템을 갖췄다. 스티어링 휠과 시트, 페달은 양산 차량과 동일한 부품을 적용했고, 남양 주행시험장을 1㎜ 단위로 정밀 스캔한 데이터를 활용해 실제 시험로와 유사한 주행 환경을 구현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다양한 조건을 즉시 비교·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연구원은 화면 속 차량의 타이어와 서스펜션 조건을 몇 초 만에 바꾸며 서로 다른 사양을 연이어 비교했다.
정 책임연구원은 "실차 시험에서는 부품을 교체할 때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곳에서는 각 사양을 파라미터로 관리하기 때문에 다양한 조건을 짧은 시간 안에 반복 검증할 수 있다"며 "실차 평가와 병행하면 차량의 성능과 신뢰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측정 센터에서 광학식 3D 스캐너로 차량을 측정하는 모습. /현대차 제공
차량 품질의 시작은 '치수'…DMC서 양산 품질까지 관리
디지털 측정 센터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들려온 설명은 "좋은 차는 치수에서 시작된다"는 말이었다. 차량의 성능이나 디자인보다 앞서 부품 하나하나가 설계한 위치에 정확히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외관의 갭(Gap)과 단차(Flush)가 어긋나면 차가 엉성해 보일 뿐 아니라 주행 소음이나 누수로 이어질 수 있다. 한진수 파이롯트품질검증팀 팀장은 "차량 품질을 이야기할 때 디자인이나 성능을 먼저 떠올리지만, 그 기반에는 정확한 치수 관리가 있다"며 "DMC는 차량의 치수 품질을 측정하고 검증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먼저 찾은 바디 스트럭처 측정실에서는 접촉식 3차원 측정장비(CMM)가 차량 뼈대의 좌표를 하나씩 읽어내고 있었다. 차량 한 대당 약 1000개의 측정 포인트를 분석하고, 포인트 간 거리와 편차까지 함께 계산해 완성차의 품질을 예측한다. 이렇게 구축한 평가 기준은 양산 공장에도 그대로 적용돼 개발 단계의 품질 기준을 생산 과정까지 이어간다.
이어 이동한 무빙 부품 측정 공간에서는 로봇 암에 장착된 3D 스캐너가 후드와 도어, 테일게이트 형상을 자동으로 측정했다. 한 팀장은 "예전에는 사람이 직접 검사구에 부품을 올려 측정했지만 지금은 3D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상 공간에서 장착 상태까지 검증할 수 있다"며 "문제가 발생해도 어느 부품에서 원인이 생겼는지 훨씬 빠르게 찾아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적층 제조 솔루션 센터에서 액상 레진을 경화해 부품을 적층 제조하는 모습. /현대차 제공
깎지 않고 쌓는다…자동차 개발 바꾸는 '적층 제조'
적층 제조 솔루션 센터(AMSC)에 들어서자 절삭 가공과 적층 제조의 차이를 보여주는 전시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강희 적층제조솔루션팀 팀장은 "기존 제조 방식이 재료를 깎아 형상을 만드는 방식이라면 적층 제조는 재료를 한 층씩 쌓아 원하는 형상을 만드는 공법"이라며 "가장 큰 차이는 금형 없이 부품을 제작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적층 제조는 자동차 개발 전 과정에서 활용된다. 선행 개발 단계에서는 설계 아이디어를 빠르게 검증하고, 시험·평가 단계에서는 시제품을 반복 제작해 성능을 확인한다. 양산 이후에도 작업용 지그와 검사구는 물론 헤리티지 차량 복원, 모터스포츠 부품 제작 등에 폭넓게 쓰이고 있다.
현장에서는 액상 레진을 자외선으로 굳혀 부품을 만드는 설비와 로봇 팔이 용접 아크로 금속 와이어를 녹여 한 층씩 쌓아 올리는 WAAM(Wire Arc Additive Manufacturing) 공정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불꽃을 튀기며 금속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구원은 "기존에는 금속 덩어리를 깎아 만들던 모터 하우징도 필요한 부분만 적층한 뒤 후가공을 하기 때문에 재료 사용량과 가공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품질검사셀에서는 출력한 부품을 3D 스캔해 설계 데이터와 비교하고, 인장강도와 충격시험 등 물성 평가도 함께 진행했다. 단순히 시제품을 빠르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품질을 확보하기 위한 과정이다. 한 팀장은 "적층 제조의 역할은 단순히 부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조 기술과 품질 기준을 함께 축적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노바 랩에서 제어기와 기능 검증을 위해 제작된 와이어카의 모습. /현대차 제공
실차 제작 전 전장 검증…SDV 개발 효율 높이는 노바 랩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차세대 개방형 제어기 검증실인 노바 랩이다. 차량이 완성되기 전 전기·전자 시스템과 소프트웨어를 미리 검증하는 공간으로, SDV(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시대에 맞춰 제어기와 통신 체계를 시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상연 파이롯트전장제어개발팀 파트장은 "노바 랩은 실차 제작 전 차량에 들어가는 회로와 전장 부품을 연결해 기능을 검증하는 곳"이라며 "제어기 검증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실 안에는 완성차 대신 수백 개의 배선과 제어기, 전장 부품이 연결된 '와이어카(Wire-car)'가 놓여 있었다. 차체만 없을 뿐 차량의 전기·전자 시스템을 그대로 구현한 검증 플랫폼이다. 차량 한 대에는 평균 300여 개의 전장 부품과 500여 개의 커넥터가 연결된다.
이어 검증 셀에서는 회로와 통신, 기능, 진단을 차례로 점검하는 시연이 진행됐다. 연구원이 공조와 시트, 램프를 조작하자 화면에는 제어기 신호와 통신 로그가 실시간으로 표시됐고, 정상 동작 여부도 즉시 확인됐다. 외기온 센서에 공급하는 전압을 바꾸자 클러스터에는 영하의 외기온과 결빙 경고가 나타났다. 실제 차량을 제작하지 않고도 다양한 상황을 반복해 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
주행 조건 검증에서는 소형 다이나모미터(Torque Wheel Dynamometer)가 실제 도로의 주행 저항을 구현했고, ADAS 시뮬레이터는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과 차로 유지 보조, 전방 충돌방지 보조 기능을 실제 주행처럼 재현했다. 김 파트장은 "실차 제작 전에 통신 오류나 제어기 간 충돌을 미리 찾아내는 것이 노바 랩의 역할"이라며 "보이지 않는 문제를 사전에 해결해 차량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노바 랩에서 연구원들이 와이어카를 활용해 차량 기능과 제어기를 검증하고 있다. /현대차 제공
남양기술연구소에서 둘러본 네 개의 연구 시설은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공통점은 하나였다. 실차 제작 이전 단계에서 차량의 성능과 품질을 최대한 검증해 개발 효율과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가상환경에서 주행을 시험하고, 차량의 치수를 정밀하게 측정하며, 필요한 부품을 직접 제작하고, 전기·전자 시스템까지 사전에 검증하는 개발 체계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자동차 개발이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와 디지털 기술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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