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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화가 달러당 163엔을 넘어섰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직후 75엔까지 오르며 기염을 토했던 엔화가 15년 사이 절반 이상 고꾸라졌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은행은 지난 6월 기준금리를 0.75%에서 1%로 올렸지만 속수무책이다. 주목할 점은 중동전쟁에도 불구하고 엔화 하락세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거 엔화는 국제정세가 불안해지면 강세를 보이는 대표적 안전자산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미국·이란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상승하자 오히려 엔화가 떨어졌다. 원유를 사와야 하는 일본 정부의 달러 수요는 증가한 반면 안전자산으로서의 엔화 수요는 줄었기 때문이다.
엔화 약세의 가장 근본적 원인은 낮은 금리다. 일본의 지난 6월 신선식품 및 에너지를 제외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7%다. 기준금리를 1%로 올렸지만 물가 상승률 탓에 실질금리는 여전히 마이너스인 셈이다. 엔화를 보유하면 구매력이 점점 줄어드니 미국 국채와 해외 주식에 투자가 몰린다. 일본의 개인·기업·연기금이 해외자산을 사기 위해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면서 엔저가 구조화됐다.
일본의 산업구조 변화도 엔화 하락을 부추긴다. 일본은 자동차와 기계를 수출해 막대한 달러를 벌지만 에너지와 디지털 서비스에서 돈이 새나간다. 일본 기업과 소비자가 미국의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검색, 인공지능 등 각종 플랫폼을 사용하면서 발생한 디지털 적자는 2024년 약 6조8천억엔으로 추산된다. 과거 원유를 사기 위해 달러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클라우드와 인공지능 사용을 위해 달러가 필요하다.
엔저의 또 다른 원인은 국가부채와 통화정책이 얽힌 구조에 있다. 일본 정부 부채는 국내총생산의 200%를 훨씬 넘는다. 2025 회계연도 말 일반 국채 잔액만 약 1천128조5천억엔이다. 그동안 이처럼 많은 부채가 문제되지 않았던 것은 대부분을 국내에서 소화했고 금리가 사실상 0%였기 때문이다.
아베노믹스가 시작된 2013년 이후 일본은행은 대규모로 국채를 사들였다.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으로 국채 가격은 오르고 금리는 떨어져 정부는 국채를 계속 발행할 수 있었다. 낮은 금리 덕에 주가와 부동산 가격은 상승했지만 산업 구조개혁과 재정 개혁은 뒤로 밀렸다.
2026년 3월 현재 일본은행은 일본 국채와 단기증권의 약 42.2%, 금액으로는 485조4천억엔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 국채시장의 중앙은행 의존도가 지나치다. 일본은행이 매입을 줄이면 국채 가격이 떨어지고 금리가 오른다. 반대로 국채시장 안정을 위해 국채를 계속 사들이면 돈이 풀려 엔화가 더 약해진다. 엔화를 지키려면 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금리를 크게 올리면 정부의 이자 부담과 기업 자금조달 비용이 급증한다. 일본은 지금 엔화와 국채 중 어느 한쪽을 지키려 할수록 다른 쪽이 흔들리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카이치 정권은 휘발유 등 잠정세율 폐지 및 식품소비세율 한시적 인하와 같은 감세를 추진하고 있다. 설상가상 대규모 양적완화도 밀어 붙이고 있는데 이미 21조3천억엔 규모의 경기대책을 발표했고, 이를 위해 11조엔이 넘는 추가 국채를 발행키로 했다. 이에 닛케이 신문은 "다카이치 내각의 경제 정책이 일본 경제의 체질 개선 효과로 이어지기 전에 엔저와 채권 약세가 고물가, 금리 상승 등 악영향을 초래해 정책 수행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 정재계에선 다카이치 내각이 영국 로리즈 트러스 내각과 똑같은 운명을 걸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2022년 트러스 내각은 대규모 감세와 에너지 지원을 담은 미니 예산을 발표했지만, 재원 조달 방안과 중기 재정계획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 시장은 이를 무책임한 재정 확대 신호로 받아들여 파운드화가 급락하고 장기 국채금리는 급등했다. 연기금의 부채연계투자 운용에서도 유동성 위기가 발생했다. 결국 영란은행이 장기 국채 매입에 나섰고, 정책 신뢰를 잃은 트러스 내각은 출범 49일 만에 붕괴했다.
최근 한국 상황도 만만치 않다. 2026년 원·달러 환율은 1,500원 안팎의 초약세권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연금과 개인투자자의 해외투자가 확대되면서 구조적인 달러 수요도 증가했다. 국민연금은 2025년 10월 기준 1천427조7천억원의 자산 가운데 약 58%를 해외에 투자했다. 지난 7월 SK하이닉스가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발행으로 조달한 달러 일부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7월26일 현재 원·달러 환율은 1,463원까지 내려갔지만 이런 일회성 자금에 계속 의존할 수는 없다.
한국의 정부 부채는 일본보다 훨씬 낮지만 증가 속도는 빠르다. IMF는 한국의 GDP 대비 정부 부채가 2026년 54.4%에서 2030년 61.7%, 2031년 63.1%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고령화에 따른 연금·건강보험·돌봄 지출까지 고려하면 장기적인 부담은 더 커질 수 있다. 원화는 엔화처럼 안전통화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보다 낮은 정부 부채비율에서도 외환시장 충격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은 분명하다. 민생회복을 명분으로 한 나눠주기 식 지원금 살포와 감세 포퓰리즘 등으로 인한 국가 부채 증가를 막아야 한다. 재정 지출은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높이고 AI·반도체·전력망·원전·로봇·방산과 같은 미래 한국을 먹여 살릴 산업에 핀셋 지원돼야 한다. 해외투자는 억제할 수도 없지만 억제해서도 안 된다. 국민연금과 개인에게 국내 자산을 사도록 요구하려면 먼저 국내 기업의 수익성과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과 인공지능 서비스의 해외 의존도를 줄여 서비스 수지에서 빠져나가는 달러도 점차 줄여나가야 한다.
시장은 일본 정부가 금리를 충분히 올리지 못하고 재정을 과감히 개혁하기 어려워 결국 엔화 약세와 인플레이션을 용인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원화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도 외환보유고를 풀거나 연기금과 기업의 달러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 생산성을 높이고 재정을 절제하며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일본의 엔저는 한국에 구조개혁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