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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양심과 판결은 흔히 외부의 물리적 외압으로부터만 위협받는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사법의 역사는 때로 ‘피할 수 있었던 구조적 외관’ 하나 때문에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곤 했다. 영미법의 오랜 법언인 “정의는 실현되는 것만으로 부족하며,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이 눈으로 명백히 보여야 한다(Justice must not only be done, it must be seen to be done)”는 경구는 법관 윤리의 제1원칙이다.

- /김종훈 보도국장
조희대 대법원장이 마주한 대법관 후보 제청을 둘러싼 고뇌는 단순한 ‘인사 파동’이나 특정 인물에 대한 호불호를 훌쩍 뛰어넘는다. 현직 헌법재판관의 배우자인 고위 법관을 사법부 최고 종심인 대법관으로 제청해야 한다는 정치권 일각의 유무형 압박 속에서, 조 대법원장이 마주한 벽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사법권 최고기관 간 이해충돌’이라는 제도적 모순이었다.
문제의 본질은 ‘부부 법관’ 그 자체가 아니다. 하급심 판사 부부는 법조계에 이미 적지 않다. 그러나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은 차원이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법령의 최종 해석과 헌법 수호라는 헌정 질서의 양대 축으로서, 상호 견제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독립 기관이다.
특히 정치권 일각에서 법원의 확정판결까지 헌법재판소가 다시 심사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이른바 ‘재판소원’ 허용 법안이 거론되는 작금의 현실을 감안하면 사태는 더욱 엄중해진다. 사실상의 ‘4심제’로 사법 체계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대법관 아내가 내린 최종 판결을 남편인 헌법재판관이 헌법재판대 위에 올려놓고 위헌 여부를 재단해야 하는 기이한 광경이 일상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초래할 실질적 위험은 헌법재판의 파행이다. 이해충돌을 피하기 위해 남편인 헌법재판관이 재판을 회피하거나 제척된다고 가정해 보자.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9명 중 최소 ‘6인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위헌이나 인용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엄격한 의결 정족수 체제다. 재판관 1명이 사적 사유로 배제되는 순간, 실질적으로 8인 체제에서 6인의 동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는 소송 당사자의 기본권 구제 문턱을 불합리하게 끌어올려 사법 정의의 심각한 왜곡을 낳는다. 남편이 심리에 참여해도 특혜와 카르텔 의혹이, 빠져도 당사자의 재판받을 권리가 침해되는 ‘외통수’에 갇히는 셈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의 붕괴다. 여야 정쟁이 극에 달한 선거법 위반 사건이나 탄핵, 수사기관 권한쟁의 같은 민감한 정치적 판결이 양대 기관을 오갈 때마다 여론은 판결문의 논리가 아니라 “어느 연구회 출신 부부의 입김이 작용했는가”를 먼저 의심할 것이다. 한 번 ‘정치적 편향’과 ‘가족 카르텔’이라는 낙인이 찍힌 판결은 승복의 미덕을 잃고 끝없는 불복과 국론 분열의 도화선이 될 뿐이다.
조 대법원장이 제청권 행사 과정에서 보여준 숙고와 번민은 바로 이 ‘사법 신뢰의 마지노선’을 지키려는 헌법적 고뇌로 보인다.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헌법 제104조 제2항이 부여한 고유 권한이다. 행정부나 입법부가 정략적 이해관계나 ‘코드 인사’의 잣대로 이를 흔들려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헌법이 엄격히 규정한 삼권분립의 경계를 침범하는 위험한 시도다.
판결은 법전의 활자만으로 살아 숨 쉬지 않는다. 판결에 권위를 부여하는 원천은 판결을 내리는 주체에 대한 국민의 온전한 믿음이다. “아무리 훌륭한 법관이라도 의심받을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 사법의 도리”라는 법조계 원로들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법의 공정성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지켜내려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고독한 제청권 수호는, 진영 논리를 떠나 법치주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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