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마가 이사왔다'에서 길구 역을 맡은 배우 안보현 / 사진 : CJ ENM
* 해당 인터뷰에는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을 거로 생각한다. 걸어가던 길 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 발을 떼기 어려운 시기.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 속 길구는 그런 시기에 있다. 그렇게 멈춰선 길에서 그가 하는 거라곤 인형을 뽑는 일 정도다. 인형을 뽑고, 쌓아두고,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선지(임윤아)와 그의 아빠(성동일)을 만나 전혀 다른 길에 들어서며 한 발 떼는 방법을 비로소 배운다.
길구의 그런 시간은 배우 안보현으로 인해 빛난다. 안보현은 그동안 쓰던 커다란 몸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구기는 데 사용한다. 길을 잃은 '길구'가 그 모습 그대로 담겼던 건, 안보현 역시 그런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뻗어내던 주먹을 움켜쥔 그 시간이 '길구'에게 담겼다. 그동안 영화 '베테랑2', 드라마 '재벌X형사' 등의 작품에서 진한 테스토스테론 향을 풍겼다면,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에서는 진한 에스트로겐 향을 풍긴다. 그런데 그에게서 나는 그 향 역시 향기롭다. 청소를 좋아하고, 음식을 잘 나열해서 먹는 걸 좋아하는 안보현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 스틸컷 / 사진 : CJ ENM
Q. '길구'는 주먹을 뻗는 인물이 아니라, 몸을 한껏 구기는 인물이었다.
"길구가 입고 있는 티셔츠도 '조정' 티셔츠예요. 자기 치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죠. 그래서 초반에는 그레이에 가까운 사람이었어요. 메이크업도 거의 안 하듯이 편하게 촬영했고요.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쳐다보면, 눈빛이 강렬해서 오해를 사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길구는 힘을 완전히 빼고 임했어요. 어눌하고, 고장 난 듯 느린 부분이 악마인 선지를 만나며 변화하는 지점이 있죠."
Q. 그래서 더욱 '악마가 이사왔다'가 길구의 성장 서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는 길구의 성장 이야기가 맞다고 생각해요. 이상근 감독님과도 그렇게 이야기했고요. 쉽게 고장 나고, 누구에게도 큰소리치지 못하는 친구가 선지(임윤아)와 악마 선지를 만나고 황당한 일을 겪으며,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죠. 그 과정을 통해 내면의 상처도 치유하는 경험을 하고요. 길구가 잃어버린 길을 찾은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에서 길구 역을 맡은 배우 안보현 / 사진 : CJ ENM
Q. 전작에서 굉장히 강렬하고, 강인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기 때문인지, 배우 안보현에게 '길을 잃은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겠다 싶었는데, 굉장히 '길구 그 자체'로 다가왔다.
"너무 좋았던 게 '길구가 됐구나', '너 길구같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였어요.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윤아도, (주)현영이도, 성동일 선배님도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저도 그런 시간이 있었어요. 인생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던 순간이요. 운동을 오랫동안 했거든요. 그런데 할 수 없게 되고, 직업 군인을 선택할지, 새롭게 접한 '모델'의 꿈을 쫓아갈 것인지. 그런 고민을 했어요. 가족들도 부양해야 했고, 꿈을 쫓아간다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야 했고요. 이런 부담감 속에서 제 길을 찾아갔던 그때의 저에게 길구가 있었어요. 길구도 내향적이잖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복싱을 오래 했는데, 복싱은 개인 운동이라 누구와 소통하기보다 혼자만의 채찍질해야 하거든요. 그 시기를 떠올렸습니다."
Q. 이른바 배우 안보현은 굉장히 '테토남(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을 일컫는 남성다움)'일 것 같은데 의외의 '에겐남(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을 일컫는 여성스러움)' 면모가 있나 보다.
"굉장히 디테일한 편이에요. 제가 그렇게 생기지 않았지만, 정성스레 요리해서 먹는 걸 좋아하고요. 아기자기한 것들을 좋아해요. 의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생긴 것과 다르게 청소하는 것도 좋아하고, 이불 빨래도 꼬박꼬박하는 걸 좋아합니다. 외적인 모습과는 좀 다르죠."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 스틸컷 / 사진 : CJ ENM
Q. 길구는 첫눈에 반하는 낮선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새벽 2시면 악마로 변하는 선지를 만나게 됐다. 두 명의 선지를 각각 어떤 감정으로 마주했는지 궁금하다.
"영화가 길구가 첫눈에 반한 선지를 향한 호기심으로 시작되잖아요. 그러다가 악마가 된 선지를 보고 당황하고, 관찰하기 시작하다가, 이상한 아르바이트를 제안받게 되고요. 그 모든 시작은 낮 선지였어요. 어떤 분은 '삼각관계야?'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제가 생각할 때 길구가 생각한 악마 선지를 향한 마음은 '치유해 주고 싶다' 였던 것 같아요. 악마 선지는 다 아이같은 모습이에요. 그래서 더 치유해 주고 싶다는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다가간 것 같아요. 결말을 보면, 선지와의 열린 결말이잖아요. 각자의 길을 찾아가는 그 위에서 서로를 느낀 것 같아요."
Q. 악마 선지와의 마지막 장면이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애틋하다. 또 일반적이지 않은 대사를 세 번이나 반복해야 했는데, 어떤 마음으로 임했는지 궁금하다.
"비하인드로 그 장면 찍을 때 엄청나게 울었어요. 울면 안되는 장면이거든요. 제가 우는 순간 악마 선지에 대한 애정으로 보일 수도 있어서요. 그런데 너무 펑펑 울어서, 부은 눈이 가라앉을 때까지 촬영이 미뤄졌어요. 오글거린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간절하게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불러주길 바랐던 그 마음을 바라보며, 울음이 터지는 걸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예쁘게 나온 것 같아요.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고생했다고, 쓰다듬어주는 느낌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Q. 배우로 10여 년 동안의 시간을 보내왔다. 스스로 마주하는 자신의 성장이 있을까.
"첫 드라마로 치면 10년이 넘었는데, '희야'라는 영화를 기점으로 10년이 된 것 같아요. 제가 그려온 인생 그래프보다 감사하게도 빠르게 높이 올라가는 것 같아 감사함이 그고요. '길구'라는 캐릭터도 사실 자신 있어서라기보다, 반신반의하면서 도전하는 캐릭터였어요. 그리고 도전을 마친 후, '더 많은 도전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입니다. 더 다채로운 색을 가질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겠다고요. 앞으로도 안주하지 않고, 초심 그대로, 계속 도전하며 다양한 장르를 보여주고 싶어요."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에서 길구 역을 맡은 배우 안보현 / 사진 :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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