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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아름답구나"…영화 ‘국보’ [리뷰]

조명현 기자 ㅣ midol13@chosun.com
등록 2025.11.14 07:55

영화 '국보' 스틸컷 / 사진 : 미디어캐슬 제공

맨살에 흰 붓이 닿는다. 붓끝에 움찔하는 소년은 야쿠자의 아들, 키쿠오(쿠로카와 소야). 이날은 신년회 날이자, 키쿠오가 가부키 극 ‘세키노토‘를 선보이는 날이다. 무대 위에서 상대 배우는 키쿠오를 향해 “이 여인은 어디서 왔는가?“ 묻는다. 그리고 키쿠오는 답한다.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이 대사는 단지 극 속 인물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무대 아래 객석에 앉은 가부키 명문가의 당주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 그리고 지금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도 닿는다. 그렇게 ‘국보’의 문이 열린다.

키쿠오가 ’세키노토‘를 선보인 날, 그의 아버지이자 야쿠자 타치바나파의 수장인 타치바나는 반대파의 습격으로 숨을 거둔다. 흰 눈이 소복소복 쌓이던 날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키쿠오는 한지로(와타나베 켄)에게 거둬진다. 처음 키쿠오가 무대 위 한지로를 마주한 건, 그와 그의 아들 슌스케가 함께 선보이는 ’렌지시‘ 였다. 아빠 사자가 새끼 사자를 벼랑으로 밀어 사랑을 표현한다는 내용의 극이다. 이 장면은 곧 두 사람의 운명이자 한지로의 방식이 된다. 이후 재능을 타고나 제자로 자라난 키쿠오(요시자와 료)와 적통으로 성장한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는 한지로의 혹독한 가르침 속에서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당기며 평생의 라이벌이 된다.

영화 '국보' 스틸컷 / 사진 : 미디어캐슬 제공

가부키는 17세기 초 시작됐다. 에도막부는 풍기 문란을 이유로 여자를 무대에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 역을 하게 되었고, 이를 ‘온나카타’라고 불렀다. 눈인지, 꽃가루인지, 뭔지 모를 반짝이며 떨어지는 것들을 배경으로 '가부키'와 '온나가타'를 그렇게 설명하며 영화 ‘국보’는 시작된다. '국보'는 그 설명 그대로 '가부키'에서 여자 역을 연기하는 남자 배우 '온나가타'를 중심에 두고 전개된다. 여자가 될 수 없지만, 가장 완벽한 여성을 연기해야 하는 모순을 가진 존재다.

키쿠오는 '온나가타'의 그 모순과 아름다움을 타고났다. 슌스케는 가문의 혈통과 정통을 체화하고 태어났다. 타고난 재능과 혈통은 서로에게 없기에 더 탐나는 것이 되었다. 둘의 갈망은 서로를 바닥으로 향하게 하기도 한다. 결국 두 사람의 목표는 단 하나다. “일본 최고의 가부키 배우.” 강렬한 빛을 향해 달리는 동안, 그 빛은 두 사람의 삶에 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영화는 가부키 극 자체를 인물들의 삶과 평행하게 배치한다. 키쿠오가 처음 문을 연 ‘세키노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반영하는 ‘렌지시’, 질투가 여인을 뱀으로 바꿔버리는 ‘도죠지의 두 사람’, 이번 생의 비극을 다음 생에서라도 함께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소네자키 동반자살’까지. 무대 위 허구와 무대 밖 현실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며, 관객은 두 남자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을 극 속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무대 앞, 무대 뒤, 막이 내린 뒤의 작은 숨소리까지도 집중하게 한다.

영화 '국보' 스틸컷 / 사진 : 미디어캐슬 제공

"배우란 것들은 지독히 탐욕스런 동물"이라는 대사처럼, 일본 최고의 가부키 배우가 되기 위한 과정은 무언가를 얻어가는 과정이라기보다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에 가깝다. 처음에는 뼈가 자세를 외울 때까지 자기의 몸을 잃어가며 '온나가타'의 움직임을 몸에 새겼다. 점차 무대를 향한 집착이 온몸으로 번지며 주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 '도대체 예술이 무엇이기에'라는 탄식을 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에 끝내는 감탄하게 된다. 이상일 감독이 완성한 '국보'의 세상이다.

이상일 감독은 이 평행 구조를 집요할 만큼 정교하게 설계한다. 영화 속 색의 대비, 특히 새하얀 화장과 그 위에 얹히는 뜨거운 붉음은 인물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는 “가부키 화장에서 흰색은 배우가 자신을 지우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 위에 더해지는 붉음은 배역이 배우의 얼굴 위에 새겨지는 흔적이다. 그래서 극 중 슌스케가 키쿠오의 얼굴에 붉은색을 그려 넣는 순간은, 두 사람의 감정과 집착, 사랑과 파괴의 복합이 한 번에 겹쳐 보인다.

영화 '국보' 스틸컷 / 사진 : 미디어캐슬 제공

이상일 감독은 재일 감독이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외부에서 온 인간’이라고 말하며 한국인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혈통과 뿌리, 내부자와 외부자의 경계. ‘국보’가 다루는 주제의 중심에 있는 구조는 감독 자신의 삶의 구조와 겹쳐진다. 그래서 그는 “한국 관객이 이 지점을 더 밀접하게 느껴준다면 감사할 것”이라고 바람을 덧붙였다.

영화 '국보'는 일본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는 일본 실사 영화로는 높은 제작비인 12억엔(약 113억원)을 들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개봉 102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일본에서 실사 영화로는 2003년 개봉한 영화 '춤추는 대수사선 더 무비2: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에 이어 역대 흥행 2위에 오른 작품이 됐다. 이 작품이 단순한 원작 성공의 결과가 아니라, 전통예술의 구조와 인간의 감정을 품은 서사의 힘이고, 아름다운 비주얼의 힘이며, 기묘하면서도 힘 있는 소리의 힘임을 증명한다.

숫자와 기록을 모두 내려놓고 영화를 떠난 뒤에도 한 문장이 남는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예술은 유한을 영원으로 바꾼다. ‘국보’는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눈부신지, 약 175분 동안 집요하게 증명한다. 15세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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